죽기 전에 꼭 해야할 일이 무엇일까. 버킷 리스트를 적어보는 사람도 있다지만 나는 '용서'라는 단어만 떠오른다. 내가 상처 준 사람들에게 용서받는 일, 내게 상처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 죽기 전에 그것만 말끔하게 정리하고 싶다.
하지만 용서받는 것도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일단 용서받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인정하고 마주하는 일만큼 피하고 싶은 것도 없다. 스멀스멀 다양한 '핑계'와 '억울함'이 밀려온다. 그럴수밖에 없었다고 합리화하려는 비겁함을 싹 걷어내고 잘못한 것만 오롯이 드러내어 상대방에게 고개숙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면 그 다음은? 상대방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해야하는데 그것도 복잡하다. 어디서 찾을 것이며 찾았다한들 상대방이 어떤 상황인지, 오히려 아문 상처를 파헤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할 것들이 많다.
그렇다면 이 찜찜한 마음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종교생활을 하나? 그 종교를 통해 신(神)에게 용서를 구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걸까?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제대로 용서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앙금이 남지 않아야하고 상대방을 사랑하고 가엽게 여겨 자비를 베풀어야하는데 미안해하지도 않고, 나보다 더 잘살고 잘먹고 있는 사람을 나혼자 용서하느니 마느니 하는 것은 허무한 일이다. 이처럼 용서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인간이 파멸되어가는 과정을 이창동 감독은 '밀양'(2007년작)에서 섬세하게 보여준다.
신애(전도연)는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아들 준과 함께 내려온다. 피아노 교습소를 차린 신애는 적당히 통속적인 이웃들과 친해지려 노력도 하고 카센터 사장 종찬(송강호)의 구애도 받는 등 나름의 소소한 일상을 살아간다. 서른 셋 젊디젊은 과부 신애는 남들에게 무시당하기 싫어서 땅을 보러다니는 허세를 부리기도 하는데 이 작은 위선의 결과는 끔찍했다. 아들이 유괴되고 끝내는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범인은 아들이 다니는 학원 원장이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겪어내며 신애는 종교에 빠진다. 변변한 친정식구나 친구도 없이 홀로 아들을 키우며 살던 젊은 여인에게 어느날 닥친 이 벼락같은 운명에서 아마도 가장 빠르게 부여잡을 수 있는 존재가 神이었을 것이다.
불행의 크기만큼 神에게 의지한 신애는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믿은 후, 용기를 내어 범인을 찾아간다. 범인을 용서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보이고 싶었으나 웬걸, 범인은 이미 하나님에게 용서받았다며 누구보다 편안한 모습으로 웃고 있다. 신애는 아들이 죽었을 때만큼 고통스럽게 오열한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왜, 내가 하지 않은 용서를 神이 먼저 해버리는가! 신애는 교회를 찾아가 난동을 부리고 장로를 유혹하고 자해까지 한다. 그리고 정신병원까지 가게 되는 신애…. 폭풍이 지나고 마른 바람같이 스산한 신애의 곁에는 종찬만이 언제나처럼 남아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요즘의 모든 비극, 갈등은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한 '용서'의 부산물이다. 우리 인간이 저지른 모든 전쟁과 그 전쟁에 대한 복수도, 한·일 관계도, 아직 아물지 않은 세월호 문제도, 가족, 직장에서의 문제도 진정한 사과 한마디만 전했다면…. 그날 교도소 면회실에서 범인의 사과를 신애가 들었다면….용서를 구하는 일,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지만 어쩌면 그 과정 없이는,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없다. 피해자는, 상처를 받은 사람은 사실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다.
조휴정 KBS PD (KBS1라디오 '빅데이터로 보는 세상'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