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아산 상상력 이을 기업인 보고싶다

소떼 몰고 열었던 육로방북


올해는 재계의 거목 정주영(1915~2001) 회장의 탄생 100주년 되는 해다. 오는 25일 그의 탄생일을 앞두고 생전의 업적을 기리는 학술적 문화·예술행사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달 중에는 음악회가 열렸으며 심포지엄·세미나·사진전·기념식 등이 예정돼 있다.

지난 9월9일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이 '정주영과 남북관계'를 주제로 개최한 세미나도 그 중 하나였다. 정주영의 대북사업은 남북 화해와 통일, 실향민 기업인으로서 고향과 부모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담긴 사업이었다. 또 현대그룹을 창업하고 성장시킨 그의 탁월한 상상력과 추진력이 집약적으로 발휘된 사업이기도 했다.

프랑스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이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 표현한 1998년의 통일소 전달사건은 그 중 대표적이다. 소떼 방북에 담긴 상상력은 두 가지였다고 생각한다. 소 1,001마리의 1과 암수 500마리씩 짝을 맞춘 것이다.

숫자 1에 대해 정 회장은 "0은 끝을 의미하나 1은 시작을 의미하는 숫자"라고 했다. 1은 소떼가 길을 여는 금강산관광 사업의 시작을 의미했다. 암수 짝을 맞춘 것은 확대재생산에 대한 상상력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암수 1,000마리의 종자 소가 북녘땅에서 10만마리, 100만마리로 증식돼 북한의 김일성 주석도 소원했던 '이밥에 고깃국'의 재료로 쓰이길 바랐을 것이다.

소떼 방북에는 남북한 간 육로개방을 관철하겠다는 정주영의 추진력도 담겨 있었다. 그가 육로개방을 꺼리는 북측을 설득하기 위해 입이 닳도록 한 말은 "소를 하늘로 보낼 수는 없지 않으냐"였다. 그의 집요한 설득에 휴전선 북측의 삼엄한 철책이 열렸다.

분단 이후 38선을 통과한 인적 왕래가 있었지만 대부분 정치적인 것이었고 물자교류는 소떼가 처음이었다. 그 길은 아직 활짝 열리지 않았으나 그래도 개성공단으로 가는 사람과 물자가 소떼가 갔던 그 길로 오가고 있다. 그 길은 나중에 금강산 육로관광으로도 이어졌다.

정주영의 필생의 사업이었던 금강산관광 사업은 2008년 관광객 박왕자씨 피살사건 이후 7년째 중단된 상태다.

서쪽의 개성공단과 동쪽의 금강산관광 사업은 남북이 서해에서 두 차례의 해전을 치르면서도 유지됐다. 두 사업이 순조로웠다면 남북관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 같은 북의 도발은 금강산사업 중단의 여파일 수도 있다.

관광객 한 사람의 죽음으로 초래된 남북관계 후퇴와 인적·물적 희생은 너무 컸다. 세미나 발표자들은 남북의 정부를 넘나들며 사업을 추진했던 정주영 같은 기업인이 있었다면 지금의 남북 간 교착상태는 오래전에 풀렸을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모든 투자의 우선 고려사항은 경제성과 안정성이다. 그래서 대기업들은 해외 투자처로 기업 환경이 불안정한 북한보다 중국이나 동남아를 택했다. 개성공단에는 국내의 한계 중소기업들이 주로 진출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조업을 하고 있다.

금강산관광 사업이 본궤도에 올랐다면 정주영의 다음 목표는 개성공단이었을 것이다. 대북사업에 대한 정주영의 상상력은 "1,000만명의 북한 노동력을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지금의 개성공단보다는 훨씬 큰 그림이었고 실현됐다면 북의 개방을 훨씬 앞당겼을 것이다.

북한 핵 개발로 지금은 우리가 도우려 해도 도울 수 없는 상황이기는 하나 정주영의 상상력으로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열려는 기업인을 봤으면 좋겠다.

임종건 언론인 서울경제신문 전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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