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기획 종합]가족, 당신은 나의 대한민국입니다

지난 추석 연휴 기간 서울경제신문의 디지털브랜드 ‘서울경제썸’은 총 4회에 걸쳐 ‘가족, 당신은 나의 대한민국입니다’ 시리즈를 선보였습니다. 옆에 있어 오히려 간과하기 쉬운 ‘내 가족’을 되새겨보자는 취지에서 마련한 코너였는데요. 네티즌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나아가 내 가족의 삶을 통해 대한민국을 조명해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 정치인들의 관점에서만 주로 서술돼온 대한민국 대신 우려 주변의 수없이 많은 보통 사람의 이야기도 충분히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서울경제썸’ 인턴기자들이 풀어내는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 동생,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이런저런 바쁜 일로 추석 연휴 기간 ‘가족, 당신은 나의 대한민국입니다’ 시리즈를 놓치신 분들을 위해 이를 묶은 <종합편>을 준비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라”는 한가위처럼 가족의 넉넉함, 푸근함을 이 기사로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가족, 당신은 나의 대한민국] <1> 전업주부, 엄마의 이야기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전북 고창의 선운사로 가는 다리 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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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고등학교 1학년 시절 전북 고창의 선운사로 가는 다리 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엄마




‘애 넷 딸린 대한민국 아줌마’

내 엄마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엄마에 대한 우리 가족의 대체적인 시선이 그렇다. 별생각 없이 엄마에게 밥해달라고 하고, 짜증도 엄마에게 푼다. 가끔씩 걸려오는 엄마 전화는 무시하기 일쑤다. 늘 옆에 있지만 그래서 소중함을 못 느끼는 존재, 그게 엄마다.

2015년 한가위를 맞아 ‘엄마’란 존재를 다시 생각해 본다. 전업주부인 우리 엄마, 당신은 나의 대한민국이다.

◇ 일곱 남매 중 둘째 딸, 꿈 대신 집안일 좇다

내 엄마가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성남리. 면 소재지에서도 차로 20~30분 정도는 족히 들어가야만 닿을 수 있는 시골이다. 엄마는 그 두메산골에서 일곱 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다산이 풍요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으니 ‘일곱’이란 숫자가 그리 낯선 게 아니었을테다.

집안 장남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 큰 오빠와 큰 언니를 대신해 어렸을 때부터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다. 선생이 되고 싶다는 꿈 때문에 열심히 책도 읽었지만, 그 시절 ‘둘째 딸’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은 많지 않았다. 집에 한 푼이라도 보탬이 돼야 했고, 이 때문에 내 엄마는 ‘선생님’ 대신 ‘공순이’가 됐다.

집 앞에서 두 남동생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엄마(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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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집 앞에서 두 남동생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엄마(뒤)



◇ 대한민국의 산업화, 공순이가 쉼 없이 돌린 재봉틀

1985년 고향을 떠난 내 엄마가 정착한 곳은 경기도 안산의 한 공단. 숙식이 가능한 기숙사가 있던 그곳에서 엄마는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엔 야간 대학을 다니며 공부를 계속했다. 고단한 주경야독에 잠을 청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2~3시간이 다인 시절이었지만 공부를 시작하면 하루종일 재봉틀을 돌린 뭉친 어깨가 저절로 풀리더라는 게 엄마의 얘기다. “그 때는 다 그랬어. 그렇게라도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시절 구로공단으로 대표되던 경공업 단지엔 엄마와 같은 수많은 여공들이 쉴 새 없이 기계를 돌려가며 일을 했다.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에 따르면 지난 1981년 당시 구로공단 노동자 비율은 20세 이하의 여공이 35%, 25세 이하의 여공은 무려 60%에 달했다.

노동 환경은 열악했다. 퀘퀘한 공기에 목이 메기 일쑤였고, 하루 종일 똑같은 자세로 일을 하다보니 잠깐의 휴식 땐 오히려 허리를 펼 수 없는 지경이었다는 게 엄마의 회고다.

1980년대 구로공단의 방직공장 모습. 여공들이 쉴 새 없이 재봉틀을 돌리며 작업을 하고 있다./사진제공=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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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1980년대 구로공단의 방직공장 모습. 여공들이 쉴 새 없이 재봉틀을 돌리며 작업을 하고 있다./사진제공= 국가기록원



◇ 여공에서 ‘엄마’, 전업주부에서 또 다시 워킹맘으로

엄마가 3년간의 안산 생활을 접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건 당시 병색이 완연했던 내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아픈 부모를 외면할 수 없어 찾아간 전북 고창에서 지금의 아빠를 만났다고 한다. 이모부의 소개를 통해 만난 내 엄마와 아버지는 1990년 결혼했다. 엄마 25살, 아빠 28살 때의 일이다. 그러곤 첫째인 나를 시작으로 딸 둘을 연이어 낳았다. 이렇게 내 엄마는 여공에서 ‘엄마’가 됐다.

1990년 전남 영광의 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한 우리 엄마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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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1990년 전남 영광의 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한 우리 엄마 아빠



결혼 직후 엄마는 전업 주부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아이 둘’이 보편화된 사회로 대한민국이 바뀌었지만 내 엄마와 아빠는 다산을 했고, 엄마는 나를 비롯한 자기 아이들을 보살피는 걸 자연스럽게 새 직업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주변의 다른 엄마가 그랬듯 전업 주부로서의 보통 삶을 살아갔던 내 엄마에게 변화가 찾아온 건 막내가 태어난 2002년 이후다. 아빠의 월급은 오를 기미가 없는 반면 네 남매에게 들어가는 돈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아빠와 다투는 날들이 잦아졌고, 엄마는 결국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렇게 엄마는 여공에서 엄마가 됐고, 전업주부에서 워킹맘이 됐다.



◇ 선택의 폭 넓지 않은 ‘워킹맘’들

엄마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기는 녹록지 않았다. 일곱 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학교 대신 공장을 오가야 했던 엄마는 배움이 얕았고, 이 때문에 엄마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넓지 않았다.

엄마는 손에 잡히는 건 뭐든지 했다. 화장품 방문 판매, 보험 설계사 등등. 7년 반 동안 돈이 되는 일이면 닥치는 대로 했다. 그러다 지난 2012년에 시작된 아이돌보미지원사업에 지원해 현재까지 워킹맘들의 자녀를 돌보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00년 648만명 수준이던 전업 주부 숫자는 지난해 714만명까지 늘었다. 계속된 경제 불황으로 취업 시장 자체가 급속히 냉각된 탓이다. 워킹맘들의 선택지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셈이다.

◇ ‘맘충’ 논란, 엄마는 그냥 엄마다.

엄마는 나와의 인터뷰 말미 ‘맘충’(엄마를 뜻하는 맘과 곤충의 충이 붙은 합성어)이라는, 엄마 세대엔 낯선 단어를 입에 올렸다. 자식 사랑이 과한 일부 엄마들에게 덧씌워진 ‘맘충’이란 표현을 내 엄마는 불쾌해 했다. 엄마라는 이유 때문에 많은 걸 포기하는 한 여자를 ‘곤충’으로 전락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는 게 엄마의 항변이다. 엄마는 “몇몇 극성스런 엄마들 때문에 엄마 전체가 욕을 먹고 있다는 현실이 서운하다”며 “엄마는 그냥 엄마일 뿐”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 엄마는 불쑥 “고맙다. 이렇게 인터뷰도 해주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엄마가 그동안 고생했지만 자기 자식들이 부모와 큰 갈등 없이 잘 커줘서 고맙다고 했다. 일곱 남매 중 둘째로, 여공으로, 전업주부로, 워킹맘으로 쉴 새 없이 살아오며 엄마는 그렇게 계속 “고맙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엄마에게 전한다. 나 역시 고맙다고. 그 동안 고생하셨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엄마, 당신은 나의 대한민국이라고.

[가족, 당신은 나의 대한민국] <2> 철근공 아버지와 철덜든 딸의 이야기



제 아버지는 철근공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집의 ‘뼈’를 만드는 일을 합니다.

아버지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이른 새벽 보통 일을 나가시는 까닭에 함께 있는 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이죠. 땀이 많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겐 해가 떠오르기 전 몸을 부리는 게 더 익숙한가 봅니다.

설사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 볼 일이 있다하더라도 그리 많은 말을 나누진 않습니다. 철 덜든 딸과 아버지의 사이가 으레 그렇듯 말이죠.

그런 아버지께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나를 낳기 전 아버지가 살아냈던 27년,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함께 보낸 27년의 이야기가 갑자기 궁금했습니다. 그날 아버지와 전 네 시간이 넘는 통화를 했습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1980년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시작됐습니다. 80년 5월 18일의 그 광주 말입니다.


IMF 시절의 공사장 잡부로 시작해 어느덧 13년차 철근공이 된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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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다가 가끔 지붕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어. 시원하고 위험하지 않은 곳 말이야.”

철근공 아버지가 전하는 대한민국의 이야기를 아래의 영상에 담았습니다.

철 덜든 딸이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가장의 무게를 짊어진 채 내 나이 스물일곱을 뒷바라지 해온 아버지, 당신은 나의 대한민국입니다.


[가족, 당신은 나의 대한민국] <3> 어른이 된 소년, 내 동생



제게는 두살 터울 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여느 남매들처럼 어린 시절엔 자주 투닥투닥, 가끔은 토닥토닥하며 지냈습니다.

동생은 지방대를 다닙니다. 의료분야 과학자를 꿈꾸며 전공을 선택했지만 동생 앞에 놓인 현실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엔 자신의 대학 앞에 붙은 ‘지방’이란 단어가 너무나 남루하다는 사실을 과선배들은 술자리 때마다 푸념처럼 털어놨다고 합니다. 일찌감치 꿈을 잃거나 버린 선배들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진 않을 것이라 수없이 다짐했지만 동생 역시 그게 맘처럼 쉽지 않았나 봅니다.

4학년이 된 동생이 향한 곳은 서울 노량진입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담보로 자신의 청춘을 세 평 고시원에 구겨넣은 채 동생은 오늘도 고시 책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올해 9급 공무원의 응시 인원은 20만명, 경쟁률은 51.6대 1에 이릅니다. 90kg 되는 체구를 그 좁은 바늘 구멍에 넣어 보겠다는 동생의 몸부림은 이제 한 달이 다 돼갑니다. 대한민국의 많은 청년들처럼 제 동생 또한 기약을 알 수 없는 먼 길에 막 첫 걸음을 뗀 셈입니다.

“누구랑 같이 밥을 먹고, 대화를 해보는 게 정말 오랜만이야.” 오랜만에 만난 동생이 제게 건넨 첫 마디였습니다. 친구란 존재가 자기 인생의 방해물이 되지 않을까 싶어 스스로를 철저히 ‘혼자’로 만들고 있는 대한민국 청년들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어른도 길을 잃는다’는 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소년에서 어른이 된 제 동생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어른도 길을 잃는다고. 아니, 어른이니까 길을 잃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어둠처럼 깜깜한 길을 헤매고 있는 제 동생, 당신은 내 대한민국입니다.


[가족, 당신은 나의 대한민국] <4> 손녀가 들려주는 두 노인 이야기

2004년 미국으로 여행을 떠난 할머니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아직도 할머니가 없으면 하루가 재미없다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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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2004년 미국으로 여행을 떠난 할머니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아직도 할머니가 없으면 하루가 재미없다고 말씀하신다.



한 세대의 생이 저물어간다. 일제의 지배 아래서 갖은 설움을 당하고, 민족상잔의 비극 한국 전쟁을 체험했으며, 개발 독재 시절의 엄동설한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던 지금의 할아버지·할머니들 말이다.

이들의 경험 하나하나가 우리나라의 산역사지만 오늘날 이들의 말은 철 지난 노인들의 푸념으로 폄하되기 일쑤다. 점점 높아만 가는 세대간 벽에 가로막혀 그 존재 의미마저 퇴색돼 가는 이 시대 노인들의 삶을 이해해 보고자 내 할아버지·할머니를 인터뷰했다. 대한민국사(史)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 당신은 나의 대한민국이다.

◇ “무조건 배워야 남한테 이용당하지 않는다. 알것제?”

일제 말기 한민족 말살 정책이 한창이던 1940년,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밖을 나갔다 돌아온 형이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무조건 배워야 한다. 그래야 남한테 이용당하지 않는다. 알것제?”

이는 나라 뺏긴 한에 배우지 못한 한까지 더해진 형이 동생에게 전하는 절규 같은 것이었다. 동생을 향한 형의 집념과 노력 덕분에 할아버지는 그 시절 고향인 전라남도 나주 다시면에서 유일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모국어가 아닌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고, 국화인 무궁화를 ‘눈의 피꽃’이라 부르게 했던 일제의 민족 말살 시절을 회상하며 할아버지는 “모르고 살면 세상을 밝게 못 본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할아버지 인생의 첫 번째 터닝 포인트는 광복이었다. 해방은 벼락 같이 찾아왔고, 대한민국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빨라졌다. 할아버지가 역동적으로 변해가던 서울에 터를 잡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때도 그 즈음이었다.

광복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대한민국은 또 다시 혼란에 빠졌다. 할아버지가 나주로 다시 내려가야 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다시 찾은 고향에서 지금의 할머니를 만나 결혼을 했다.

◇ 기회의 땅 ‘서울’로 다시 가다

할머니·할아버지에게 전쟁은 끔찍했다. 이념을 무기로 똑같은 말을 쓰는 사람을 죽이기도, 다른 생각을 강요하기도 하는 세상이 무서웠다. 할아버지는 “북한정치공작대원이라는 사람들이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를 가르치기도 하고 ‘인민공화국 만세’를 강요하기도 했다”며 “전쟁을 생각하면 진저리가 난다”고 말했다.

낮엔 산으로 피난을 가고 밤엔 집에 내려와 잠을 자는, 서릿발 같은 생활에 지쳐갈 무렵 휴전 소식이 들려왔다. 해방 때와 마찬가지로 벼락처럼 삶은 변화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의 본격적 원조가 시작됐고 텔레비전, 전화기, 한글 타자기 등 ‘신문물’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일반인들에게 광범위하게 알려지기 시작한 카메라를 할아버지가 손에 쥔 것도 이때다. 할아버지는 기회의 땅 서울에서 사진사가 됐다.

할아버지가 제일 많이 사용했던 사진기 3개. 할아버지 손을 거쳐간 사진기만 11개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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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할아버지가 제일 많이 사용했던 사진기 3개. 할아버지 손을 거쳐간 사진기만 11개에 달한다.



1956년 할아버지는 이후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대통령의 신당동 가옥 부근에 집을 마련, 발품을 팔며 사진사 영업을 했다. 하루는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의 초등학교 소풍을 사진으로 찍을 일이 있었는데 “경호원 2명 사이에 혼자 바나나를 들고 서 있던 어린 박지만씨가 참 인상적이었다”고 전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우리 경제는 전환점을 맞는다. 원조 경제에서 벗어나 수출주도 경제로의 탈바꿈이 이뤄졌다. 서울 곳곳에 공장들이 세워졌고, 경제 개발이 시작됐다.

할머니가 돈을 벌겠다고 뛰어든 것도 이 때다. 사람들의 손에 점점 돈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뭐든 만든 족족 팔려나가는 시대에 할머니도 장사를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아는 약장수의 말만 믿고 참새구이 장사를 해보기도 하고, 언제가부터는 집에 재봉틀을 들여와 직접 짠 모자와 스웨터 등을 내다 팔았다고 한다. 할머니의 말처럼 “아이들이 어떻게 크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일했던 시절”인 1980년대 대한민국 경제 성장이 그렇게 본격화됐다.

집에 재봉틀을 들여온 할머니가 직접 짜 내다 판 빵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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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집에 재봉틀을 들여온 할머니가 직접 짜 내다 판 빵모자



◇ “사람들이 이제 쌀을 먹네요. 우리 쌀을 팔아보는 건 어때요?”

1960~70년대 서울은 보릿고개를 넘기고 있었다. 쌀 보급률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여보, 사람들이 이제 쌀을 먹네요, 그 귀한 쌀을 말이죠. 우리 쌀을 팔아보는 건 어때요” 한 군데에 자리를 잡고 안정된 장사를 하고 싶었던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것도 이 때다.



할머니·할아버지는 지금껏 모아뒀던 돈을 투자해 왕십리에 ‘여주 쌀 상회’라는 쌀 가게를 열었다. 쌀 가게는 손님이 북적거렸다. 다만 쌀을 사러 온 손님보다 ‘백색전화’를 찾으러 온 이들이 많았다. 하왕십리 2동에 제일 먼저 전화를 들여온 덕분에 할아버지의 쌀 가게는 본의 아니게 ‘왕십리 통신원’이 됐다.

그리고 또 하나. 할머니·할아버지가 선택한 건 복덕방이었다. 강북·강남을 가리지 않고 땅값이 올랐고, 이런 부동산 붐에 복덕방도 쏠쏠한 벌이가 됐다고 두 분은 전했다.

◇ 재개발 지역된 삶의 터전, “옛 사람들은 사라지는거야”

내 할아버지·할머니의 터전 왕십리는 서울시에서 관리하는 재개발 대상이 됐다. 청춘을 다 바친 지역이 노쇠화된 것에 맞춰 두분도 나이를 먹었다.

2000년 할아버지댁을 찾아온 손자 2명을 직접 찍어준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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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2000년 할아버지댁을 찾아온 손자 2명을 직접 찍어준 할아버지



사람들은 이제 대형마트에서 쌀을 구매했고, 이 때문에 두 분의 ‘여주 쌀 상회’는 더 이상 운영하기 어려워졌다. 필름 카메라보다 더 성능이 좋은 카메라가 달린 휴대폰을 모두가 들고다니는 세상에서 ‘발로 뛰는 사진사’도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됐다. “디지털 시대가 되니 날 찾는 사람이 사라지더라. 원래 옛 사람들은 다 사라지는 것 아니겠니. 뭐든 억지로는 살 수 없는 것이니까”

인터뷰를 마치고 외가댁을 나오는 길. 할머니·할아버지께서 살아온 길, 그 굴곡진 역사를 단단히 견뎌오신 노고에 나는 두 분을 꼭 끌어안았다. 내 할머니·할아버지, 당신은 나의 자랑스런 대한민국이다.
/이종호·양아라·김현주·정수현 인턴기자, 감수=유병온기자 rocinante@sed.co.kr

유병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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