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한지의 부활


신라시대 경남 의령군 봉수면의 대동사라는 사찰에 설씨 성을 가진 주지승이 살고 있었다. 어느 봄날 주지승이 절 주변에 많이 나는 닥나무를 냇물에 담가뒀더니 껍질이 물에 풀리면서 삼베 올처럼 섬유질이 발생하는 것을 발견했다. 손으로 주물러 바위 위에 건져놓았더니 바짝 말라붙어 얇은 막처럼 변했고 이를 다듬어 종이처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의령 사람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우리 한지(韓紙)의 탄생 이야기다.

닥나무로 만들어진 한지는 예로부터 뛰어난 품질과 내구성으로 널리 명성을 떨쳐왔다. 신라의 '대방광불화엄경'에는 닥나무 껍질을 갈아 종이를 만든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중국의 '고반여사(考槃餘事)'에서는 한지가 비단같이 희고 질기며 글을 쓰면 먹이 잘 먹어 '중국에 없는 진품'이라고 극찬했다. 중국의 채륜이 종이를 발명했지만 새로운 기술을 적용해 명품 종이를 만든 것은 바로 우리 민족인 것이다. 한지 제조 과정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잿물로 닥나무를 삶아 종이의 강도를 높인다는 점이다. 또 도침(搗砧)이라는 과정에서 황촉규(닥풀)로 풀칠한 종이를 여러 장씩 겹쳐놓고 방망이질을 거치면 표면이 매끄럽고 질감이 부드러운 한지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렇게 몇 겹의 한지로 만든 갑옷은 적의 화살도 거뜬히 막아냈을 정도였다.

전통 한지가 내년부터 정부의 훈·포장 용지로 사용된다는 소식이다. 행정자치부는 조선시대 교지(敎旨)용 한지에 가장 근접한 전통 한지를 재현하기 위해 한지 업체들과 100% 국산 닥, 천연 잿물 및 황촉규·촉새발 등 전통적인 재료와 도구를 최대한 활용했다고 한다. 이뿐 아니다. 최근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는 한지를 이용한 첩보위성을 개발하고 있으며 한지로 만든 스피커가 원음에 가장 가까운 성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지천년 견오백(紙千年 絹五百)'이라고 했다. 비단은 500년을 가지만 종이는 1,000년을 간다는 뜻이다. 한지의 질긴 생명력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정상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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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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