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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긴 종이 사이로 먹 색이 배어난다. 뚫린 구멍 틈으로 바람이라도 불 듯하다. 곱게 간 먹으로 하얀 화선지 위에 섬세한 붓질을 펼쳐놓는 것이 으뜸이던 시절, 서울대 동양화과 첫 해 입학생인 권영우(1926~2013)는 붓과 먹을 한쪽으로 밀어냈고 종이를 찢었다. 파격은 반항으로도 보였으나 실험정신은 곧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예술의 독자성을 찾아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던 그는 1962년을 전후해 한지(韓紙)를 자르고, 찢고, 뚫고, 붙이는 행위로 작업을 전개하며 '종이의 화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고(故) 권영우 화백의 개인전이 삼청로 국제갤러리 1,2관에서 막을 올렸다. 1970~80년대 작가의 주요 작품 30점을 모았다.
종이를 찢고 구멍을 뚫는 작업이라 하면 루치오 폰타나(1899~1968)가 먼저 떠오른다. 1940년대 중반 폰타나가 선보인 '구멍'은 전쟁이 유발한 '총구멍'을 은유한다. 권영우의 작품 역시 전후(戰後) 실존주의의 눈으로 접근한다면 갈라진 종이를 찢긴 상처로, 배어나온 먹을 스며나온 핏빛으로 해석하기 충분하다. 하지만 권영우의 탁월함은 여러 장 정성스레 겹쳐 바른 종이가 만들어내는 입체감, 이를 손톱으로 긁고 찢어내고 뚫고 채색하는 과정에서 몸이 만들어낸 리듬감에 있다.
국제갤러리 측은 지난달 런던에서 열린 프리즈 아트페어의 '프리즈 마스터'에 한국의 대표적인 단색화 작가로 권영우를 비중 있게 소개했다. 12월6일까지. (02)735-8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