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문민정부 빛과 그림자] OECD 가입 축배 들자마자 보유외환 바닥나… 경제 주권 IMF로

■ 부메랑 맞은 '세계화'

RP10850-임창렬 부총리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의향서에 서명
1997년 12월3일 정부종합청사에서 임창렬 경제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구제금융 신청 의향서에 서명하고 있다. /서울경제DB
서울경제 지면 촬영
오른쪽은 1997년 11월21일 극비리에 방한한 스탠리 피셔 IMF 수석 부총재(현 Fed 부의장)에게 긴급자금을 요청한 사실을 알린 22일자 서울경제신문 1면. /서울경제DB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과잉투자로 몸살을 앓던 한국경제의 돌파구를 '세계화'에서 찾았다. 당시 한국경제는 실물 부문 자유화가 상당히 이뤄졌지만 금융 부문의 경우 여전히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자본시장 개방 및 금융 자유화 정책을 전격 발표했다. 그러나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으로 정점에 이르던 자신감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로 땅에 처박히고 만다.

1985년 플라자합의로 엔화가 두 배 이상 평가 절상되고 3저 호황(저유가·저금리·저환율)으로 이어지면서 한국 수출은 1980년대 중후반 승승장구했다. 1990년대 들어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과잉투자와 인건비 상승으로 1980년대 후반에 누렸던 3저 효과가 사라진 것이다. 강인수 현대경제연구원장은 "김 전 대통령이 당시 세계화를 들고 나온 것은 물건을 많이 만들어도 더 이상 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고육지책"이라고 말했다.

1994년 11월 자본시장을 개방하고 금융 자유화를 추진한다는 골자의 '세계화 구상'이 발표된다. 김 전 대통령이 자본 자유화를 결단한 가장 큰 이유는 '선진국 클럽'인 OECD 가입. 하지만 OECD 가입조건이 아직 한국에는 '시기상조'라는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근본적으로 외화부족 국가였던 탓에 해외로 돈이 빠져나가는 데 워낙 민감하기도 했다. 강 원장은 "당시만 해도 칠레 등 실패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자본 자유화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며 "우리나라도 OECD 가입을 위해 1990년대 초반부터 단계적으로 준비했고 1996년 OECD 가입에 성공했다"고 회고했다.

정부 손아귀를 벗어난 금융시장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외국인 순증권투자 잔액은 1995년 117억달러에서 1996년 151억달러로 급증했다. 종합금융회사(종금사) 30여개가 난립하면서 이들의 앞다툰 외화차입은 고스란히 외채부담으로 쌓였다.

결국 이듬해 글로벌 금융·외환시장 상황은 급격히 악화하면서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해외자본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무분별한 차입에 나섰던 금융회사들은 한계상황에 이른다. 하지만 고통은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했다. 1997년 1월 재계 14위인 한보그룹 계열사 한보철강을 시작으로 4월 삼미그룹, 7월 기아자동차가 잇따라 도산했다. 결국 1997년 11월 한국은 모라토리엄 사태를 피하기 위해 IMF에 긴급구제금융 지원을 정식 요청했다. "한국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비판에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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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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