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발음 v, f를 한글 ㅂ, ㅍ으로는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 가령 'fighting'을 '파이팅'으로 쓰고 그대로 읽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이 더 많다.
반재원(66·사진) 훈민정음연구소장은 v, f 발음을 초성 겹글자 ㅽ, ㅅㅍ로 온전히 표기할 수 있음을 예로 들면서 사라진 옛 글자 복원이 한글 세계화의 열쇠라고 주장한다.
그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쓰여 있으나 근세에 사라진 초성 합용병서(겹글자)를 그 해결점으로 보는 몇몇 한글학자·연구가들 가운데 한 명이다.
반 소장은 최근 서울 광화문 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유라시안네트워크 주최로 열린 역사인문학 강연에서 "한글 우수성을 애써 세계에 알리는 일보다 외국어까지 원발음에 가깝게 표기가 가능한 옛 글자를 살리려는 노력이 자발적으로 한글을 이용하는 인구를 늘리는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40년 가까이 한글을 연구한 반 소장은 1443년 한글 창제 당시 기준으로 보면 한글이 세계 언어의 90% 이상을 완벽히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ㅿ(반치음)처럼 소리가 없어져 사라진 글자를 구태여 우리가 쓰기 위해 다시 살릴 필요는 없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발음을 충분히 표기 가능한 글자를 맘껏 가져다 쓸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은 요구된다"고 설명했다. 가령 훈민정음에서 반설음 ㄴ으로 구성된 합용병서 ㅧ·ㅦ은 영어 th(θ·ð) 발음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 'the'는 'ㅦㅓ'라고 표기되고 혀를 살짝 빼고 '더'를 발음하는 식이다.
반 소장은 "사라진 합용병서 중 외국어 발음으로 많이 쓰일 몇몇 글자만 살리면 될 것"이라며 "우리는 쓰지 않더라도 PC 자판에 적용함으로써 외국인의 사용 기회를 늘리는 것도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한글이 창제 500여년이 지난 지금 디지털 시대에도 맞는 글자로 주목 받는 이유를 반 소장은 자연과 과학의 이치를 충실히 따른 데서 찾는다. 그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글자·소리의 원리를 설명한 초성·중성도의 모양이 동양천문도에서 발견되는 낙서(洛書)·하도(河圖)와 닮은 데서 실마리를 찾았다. 낙서는 북두칠성 등 가장 빛나는 9개 별자리이며 하도는 5행성의 운행 원리를 적어놓은 천문도다.
반 소장은 "세계 최고(最古) 석각 하늘지도로 태종4년(1395년)에 만들어진 '천상열차분야지도'나 '28수(宿·구역) 천문도'의 천간지지(天干地支) 자리에 훈민정음 글자가 정확히 같은 순서로 배치돼 있다"며 "원래 훈민정음 글자 수가 28자인 것은 천문 지식이 해박했던 세종대왕이 28수 천문도에 따라 창제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중성 순서 'ㅏ ㅑ ㅓ ㅕ…'는 조선 중종 때 학자 최세진의 훈몽자회에 따른 것이나 원래 훈민정음은 '· ㅡ ㅣ ㅗ ㅏ ㅜ…'순서로 천문원리대로 배치됐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 15년(1433년) 세종이 직접 28수 거리 및 도수 등을 일일이 측후해 천문학자 이순지에게 이를 석판에 새기게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혼천의·자격루·앙부일구 등 뛰어난 천문·계측기구가 완성됐다. 그리고 정확히 10년 후 훈민정음이 완성됐다. 반 소장은 "당시 중국의 책력·달력을 얻어다 쓰던 조선은 세종의 자주적 천문역법 제작으로 명실공히 주권국가로 발돋움했다"며 "천문으로 '우리 하늘'을 찾은 세종이 그 다음 우리글을 창제한 이유를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학계가 15세기 천문 이론을 바탕으로 만든 한글을 19세기 말 정립된 서양 언어학의 잣대로 연구해 세종의 창제 원리를 놓친 측면이 있다"며 "창제 당시보다 기능 면으로도 위축된 한글을 되살리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진제공=국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