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두바이유는 최근 배럴당 30달러 선마저 내주며 십수 년 만에 20달러대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최근 국내 정유업계는 오히려 화색이 돈다. 유가 하락에 울상 짓던 예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정유회사 주가 역시 최근 52주 최고가를 경신하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다. /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
국제 유가 하락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2014년 8월까지만 해도 배럴당 100달러 수준을 유지하던 두바이유 가격이 최근에는 20달러대까지 떨어졌다. 두바이유가 배럴당 30달러를 하회한 것은 지난 2004년 4월 이후 12년 만이다. 중동산 원유인 두바이유는 국내 원유 수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해 서부텍사스유(WTI)나 브렌트유보다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
일반적으로 정유업체들의 주가는 유가와 비슷한 흐름을 보인다. 원유로 휘발유 등의 석유 제품을 만드는 정유업체들의 실적이 유가와 커플링되는 현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는 석유 제품 수요와 원유 수요의 방향이 비교적 일치해 생기는 현상이다.
정유업체들의 실적에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석유 제품 수요가 뒷받침되는 가운데 유가가 꾸준히 오르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선 안정적인 정제마진(석유 제품 가격에서 원유 가격과 운송 비용 등을 제외한 이익)에 더해 재고수익이 추가로 발생한다. 이는 정유업체들이 원유를 매입한 이후 이 원유를 들여와 석유 제품을 만들기까지 30~40일 정도의 시차가 발생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석유 제품 가격은 출고 당일의 원유 가격(즉 더 오른 가격)을 기준으로 책정되는 데다, 원유 가격 인상으로 인한 30~40일 재고분의 평가 이익도 추가로 발생해 유가 상승 시에 정유업체들의 실적은 이중으로 혜택을 받게 된다. 실적이 좋아지면서 이 기간 정유업체들의 주가 역시 우상향 곡선을 그리게 된다.
하지만 최근 유가와 정유업체들의 주가를 비교해보면 이와 정반대되는 모습이 나타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유가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데 반해 정유업체들의 주가는 최근 52주 최고가를 경신하는 등 서로 상반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가와 정유업체 주가 간 커플링 현상이 디커플링 현상으로 바뀐 것이다.
◆ 사상 최고 주가 찍은 2011년
2008년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전 세계적인 경기 불황을 불러왔다. 경기가 위축되자 석유 제품 수요 역시 크게 꺾였다. 유가는 급락해 30달러 선까지 주저앉았고, 정유업체들의 실적도 크게 악화되며 이들 기업의 주가 역시 연일 52주 신저가를 경신했다.
반등의 계기가 마련된 건 2010년 들어 미국, EU 등의 주도로 글로벌 경기 부양을 위한 공조정책들이 나오면서부터였다. 이들의 주도로 2010년 하반기에는 글로벌 석유 제품 수요가 전년 동기 대비 2배 이상 증가하는 등 뚜렷한 회복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글로벌 석유 제품 수요 회복에 힘입어 국제 유가는 2011년 100달러대를 회복했다.
국내 정유업체들 역시 이 같은 훈풍을 타고 실적 개선이 이뤄지면서 2011년 주가가 사상 최고가를 찍는 등 화색이 돌았다. 2008년 10월 역사적 최저가인 4만 3,950원을 기록했던 정유업종 대장주 SK이노베이션의 주가는 2011년 4월 역사적 최고가인 25만 8,500원을 찍으며 600% 가까운 상승률을 보여 화제가 됐다. 당시 정유주들은 ‘차화정(자동차, 화학, 정유주의 줄임말)’으로 불리며 국내 증시를 견인하는 핵심 주도주로 꼽혔다.
이후 국제 유가는 2014년 상반기까지 100달러 위아래에서 박스권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같은 시기 국내 정유업체들의 주가는 우하향 추세로 돌아서 국제 유가 흐름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각국의 경기 부양 효과가 서서히 소멸하기 시작한 데다 미국 정유업체들의 석유 제품 수출량이 많이 늘어나면서 국내 정유업체들의 수익성이 크게 나빠졌기 때문이다.
박영훈 LIG투자증권 연구원은 말한다. “세계 최대 정유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정유업체들이 2013년 하반기부터 석유 제품 수출량을 크게 늘렸습니다. 국내 정유업체들의 실적에는 큰 부담이 됐죠. 미국 정유업체들은 국내 정유업체들이 쓰는 두바이유보다 상대적으로 더 저렴한 WTI를 쓰는 덕분에 원가경쟁력 면에서 우위에 있습니다. 이들이 설비 가동률을 높이면서 글로벌 석유 제품 공급 부담이 커졌고, 이는 국내 정유업체들의 정제마진 악화로 이어졌습니다. 이 같은 상황은 2014년 국내 정유업체들의 영업이익이 적자로 전환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 2014년 하반기엔 실적 급락
국제 유가는 2014년 하반기 들어 또다시 급락하면서 세계경제에 큰 충격을 줬다. 국제 유가가 급락한 것은 그동안 배럴당 100달러 이상의 높은 유가가 유지되면서 시추 및 정유 시설 투자가 확대돼 수급불균형이 커졌기 때문이다. 에너지 사용 효율이 높아지면서 동일한 산업 활동을 하더라도 과거 대비 에너지 사용량이 줄어들면서 원유 수요가 감소한 것도 원인이었다.
2011년 고점을 찍은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던 국내 정유업체들의 실적은 이 시기 급격히 악화되었다. 2011년 68조 3,711억 원의 매출과 2조 9,594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던 SK이노베이션은 2014년에는 65조 8,652억 원의 매출과 2,312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엇비슷한 수준의 매출액을 고려하면 수익성이 크게 나빠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SK이노베이션의 영업이익률은 2011년 4.32%에서 2012년 2.31%, 2013년 2.12%로 매년 하락하다가 2014년에는 마이너스 영업이익률(-0.35%)을 기록했다.
국제 유가가 급락하면서 국내 정유업체들의 실적 전망치도 크게 낮아졌고, 이에 정유주들의 주가도 바닥을 뚫고 내려가 연일 52주 최저가를 경신하기 시작했다. 특히 국내 3대 정유업체로 꼽히는 에쓰오일의 주가는 2014년 11월 3만 7,500원을 기록하며 2011년 고점(17만 원) 대비 약 80%나 빠지는 기록적인 하락세를 연출했다.
◆ 반전의 장 마련한 2015년
하향일로를 걷던 국내 정유업체들의 주가가 상승 반전한 건 2015년 들어 국제 유가가 반등하면서부터다. 2015년 1월부터 6월까지 두바이유는 40달러대에서 60달러대 중반까지 50% 이상 급등했다. 국내 빅3 정유업체의 주가 역시 유가 반등으로 인한 실적 개선 기대 덕분에 같은 기간 비슷한 수준의 상승률을 보이며 동조화 현상을 보였다.
2015년 하반기 들어 국제 유가가 또다시 고꾸라지며 2016년 1월 현재 두바이유가 20달러대에서 거래되고 있지만, 국내 정유업체들의 주가는 여전히 견조한 상승세를 보여 눈길을 끈다. 이충재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말한다. “그동안 주가 하락 폭이 너무 커서 반발 매수세가 몰린 것과 더불어 지난해 12월 미국이 원유 수출 자율화 조치를 취한 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동안 미국산 원유가 미국 내에서만 소비되다 보니 미국 정유업체들이 싼 가격에 이를 끌어다 쓸 수 있었는데, 원유 수출이 자율화되면서 (미국산 원유 가격이 올라가) 이들 업체가 지불해야 하는 원재료 비용이 크게 올라갔습니다. 아시아 정유업체들의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거죠.”
박영훈 LIG투자증권 연구원은 덧붙인다. “2014년 하반기와 현재를 비교하면, 당시는 유가 하락 폭이 현재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때문에 재고손실이 크게 나면서 정유업체들의 실적이 급격히 나빠졌죠. 게다가 당시에는 석유 제품 수요도 좋지 않아 정제마진 역시 지금보다 매우 낮은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상황이 많이 다르죠. 최근 유가가 하락한 배경을 보면,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가 풀리면서 (이란산 원유가 시장에 추가로 들어와) 공급이 늘어난 게 문제였거든요. 석유 제품 수요는 여전히 견조합니다. 정제마진이 계속 양호한 수준으로 나오고 있다는 말이죠. 유가 하락에 따른 재고손실은 있지만, 유가 하락 속도가 과거보다 더뎌져 손실 규모가 줄어든 데다 정제마진은 좋은 흐름을 보이다 보니 정유업체들의 실적이 최근 크게 개선됐습니다.”
박 연구원은 정유업체들의 향후 실적과 주가 흐름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박 연구원은 말한다. “지금 유가가 매우 낮은 수준이기 때문에 앞으로 유가가 더 하락한다고 해도 하락 폭이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현재 유가만 해도 많은 유전의 생산원가를 하회하는 수준이라 이들 유전이 구조조정되는 1분기 이후에는 유가의 점진적인 상승을 기대합니다. 국제 유가가 50~60달러를 넘지 않는 선에서 완만하게 상승한다고 가정하면, 저유가로 인한 석유 제품 수요가 추가로 발생해 정유업체들의 실적 및 주가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좋은 흐름을 보일 것으로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