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30대 그룹은 지금

손쉬운 길 마다하고 독자 노선 고수

현대차가 고급 브랜드 인수 꺼린 까닭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 현대차 사옥 모습.서울시 서초구 양재동 현대차 사옥 모습.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제네시스 브랜드를 세계 시장에 조기 안착시키고 브랜드 차별화를 위한 사전적 노력을 기울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차로 육성하겠다”고 말했다.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제네시스 브랜드를 세계 시장에 조기 안착시키고 브랜드 차별화를 위한 사전적 노력을 기울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차로 육성하겠다”고 말했다.


올해 초 열렸던 ‘2016 디트로이트 모터쇼’ 현장에서 제네시스 G90을 공개하고 있는 모습. 왼쪽부터 알버트 비어만 현대자동차 미국법인 부사장, 데이브 주코브스키 현대자동차 미국법인  사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피터 슈라이어 현대차 사장.올해 초 열렸던 ‘2016 디트로이트 모터쇼’ 현장에서 제네시스 G90을 공개하고 있는 모습. 왼쪽부터 알버트 비어만 현대자동차 미국법인 부사장, 데이브 주코브스키 현대자동차 미국법인 사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피터 슈라이어 현대차 사장.


<포춘코리아FORTUNE KOREA 2016년 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길을 걸었다. 그 사이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시장에 매물로 나온 고급 브랜드를 사들였다.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은 현재 많게는 10개가 넘는 브랜드를 통해 다양한 계층의 소비자를 공략하고 있다. 지난해 현대차가 독자적으로 고급 브랜드 ‘제네시스’를 내놓은 건 분명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럼에도 ‘만약 그때 고급 브랜드를 인수했으면 지금 현대차가 어떻게 달라졌을까’라는 호기심이 든다. 하제헌 기자 azzuru@hmgp.co.kr◀

20 06년 여름, 흥미로운 소식 하나가 외신을 타고 흘러 나왔다. 현대차가 재규어 인수를 검토했다는 블룸버그 통신의 기사였다. 당시 재규어는 미국 자동차 업체 포드에 속해 있었다. 대중차 브랜드인 포드는 프리미엄 브랜드에 목말라 있었다. 포드는 1989년 영국 재규어를 시작으로 1994년 영국 애스턴마틴, 1999년 스웨덴 볼보, 2000년 영국 랜드로버를 잇달아 인수했다. 포드는 이들 고급 브랜드를 통합해 ‘프리미어 자동차 그룹(Premier Auto


Group, 이하 PAG)’을 만들었다.

포드는 고급 브랜드 이미지 구축에 성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대규모 투자 이후 경기 침체가 이어져 적자를 내기 시작했다. 결국 포드는 PAG 매각 작업에 나섰다. 포드는 업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유력한 구매자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그 중에는 현대차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차는 재규어 인수 제안을 거절했다. 당시 현대차는 블룸버그를 통해 “재규어 등 프리미엄 브랜드 인수에 대해 내부 검토를 했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렸다”며 “북미·아시아 등에서의 생산 확대와 휘발유 이외 연료를 이용하는 자동차 개발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고 인수 거부 이유를 밝혔다. 이어 “현재 당면한 과제만으로도 양손이 꽉 찬 상태”라며 “이 상태에선 어떤 인수 계획도 일단 배제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현대차 관계자는 이에 대해 “한때 회사 내부에서 재규어 같은 고급차 브랜드를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한 건 사실”이라며 “그러나 우선 과제에 역량을 집중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경쟁자들의 인수·합병 전략

현대차는 2000년대 중반 불황의 늪에서도 외형과 실적이 모두 성장했다. 그런 만큼 인수·합병 여력이 받쳐줬지만, 프리미엄 완성차 브랜드를 손에 넣으려는 적극성은 보이 지 않았다. 그 사이 다른 자동차 회사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중국과 인도의 완성차 업체들은 부족한 기술력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고급차 시장에 진입하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인도의 타타그룹은 재규어와 랜드로버를, 중국의 지리자동

차는 볼보를 인수했다. 하지만 당시 이들의 인수 시도에 대해 세계 자동차 업계는 부정적 시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김필수 대림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는 말한다. “포드가 인수해서 뛰어난 인력과 수십조 원의 자본을 투자했어도 실패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타타와 지리의 잠재력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 넘었습니다. 타타와 지리 덕분에 재규어·랜드로버와 볼보는 매력적인 고급차 브랜드로 부활할 수 있었어요.”

이 같은 사실은 현대차에 큰 메시지를 전한다. 그동안 ‘한 수 아래’로만 여겼던 신흥국 시장의 완성차 업체들이 고급 브랜드들을 인수하면서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고급차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대중차 시장에선 성공했지만, 아직 고급차 시장에는 본격적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현대차는 글로벌 5위 자동차 회사다. 하지만 현대차의 위치는 여전히 애매하다. 양적 성장은 거뒀지만, 질적으로 그에 걸맞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현대차는 주요 자동차 시장에서 ‘가격에 비해 성능이 우수한 차를 만드는 회사’라는 이미지가 여전히 강하다. 이는 회사 수익성에도 영향을 줄 수밖 에 없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IHS에 따르면, 2010~2014년 동안 전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고급차는 연평균 판매율이 10.5%, 대중차는 6% 증가했다.

고급차로 성장 한계 돌파해야


현대차는 고급 브랜드 독자개발이라는 ‘마이웨이’를 선택했다. 현대차는 지난해 12월 고급 브랜드 제네시스의 첫 차인 EQ900을 국내에 출시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제네시스 브랜드를 세계 시장에 조기 안착시키고 브랜드 차별화를 위한 전사적 노력을 통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차로 육성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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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는 올해 미국에서도 EQ900(미국명 G90)을 판매한다. 미국은 세계 고급차 시장의 격전지로 꼽힌다. 미국에서 G90이 성공하지 못할 경우 제네시스 브랜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올해가 사실상 제네시스 브랜드의 성공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해인 셈이다. 박홍재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소장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은 고소득층의 고급차 수요와 중산층 이하의 저가차 수요로 나뉘는 추세”라며 “특히 고급차 수요가 늘고 있는 신흥국 시장에서 제네시스 브랜드가 입지를 갖추려면 먼저 미국에서 성공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현대차가 오랜 세월 동안 준비한 끝에 고급 브랜드 출시라는 승부수를 띄운 이유는 지금과 같은 단일 브랜드 전략으론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대차(기아차 포함)는 지난해까지 2년 연속으로 글로벌 판매량 800만 대 안착에 성공했다. 이제 질적 성장으로 도약해야 할 단계에 접어들었다. 제네시스 브랜드 출시는 현대차그룹이 도요타나 폭스바겐과 같은 대형 자동차그룹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한 첫 걸음인 셈이다. 현대차는 1967년 창립 이래 48년 동안 현대라는 단일 브랜드로 글로벌 자동차시장을 공략해 왔다. 기아차를 인수했지만, 현대차와 사실상 차별화를 이루지는 못했다.

폭스바겐이 보여준 인수·합병의 묘미

인수·합병은 규모 키우기와 함께 약점을 보강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원하는 대중 브랜드 또는 첨단기술이 필요한 후발 주자들이 인수·합병을 통해 약점을 채운다.

김필수 대림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는 말한다. “고급차를 개발하거나 브랜드 특성화를 통해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가장 빠르게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이 프리미엄 브랜드 인수입니다. 현대차가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대차에 대한 영국 애스턴마틴의 러브콜은 여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일반 세단과 다른 고급 기술을 사용하는 슈퍼카 브랜드를 통해 현대차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국 슈퍼카 브랜드인 애스턴마틴은 1994년 미국 포드에 인수됐다가 지금은 사모펀드(인베스트 인더스트리얼, 테하라 캐피탈 공동 소유)의 손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현대차가 애스턴마틴을 인수할 경우 프리미엄 슈퍼카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인수·합병에 가장 중요한 실탄을 확보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16조 원에 달하는 현금과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자동차 업계는 애스턴마틴 인수 대금이 1조 5,000억 원 정도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현대차가 인수하기에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액수다. 이에 대해 현대차 관계자는 “매물을 내놓은 업체가 금융시장을 중심으로 바람을 잡으면서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 소문이 돌고 있을 뿐”이라며 “회사 내부에선 구체적으로 인수 계획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차가 고급 브랜드를 인수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현대차는 10여 년 전부터 폭스바겐 그룹을 벤치마킹했다. 김필수 대림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는 말한다. “폭스바겐의 전략은 바로 인수·합병이었습니다. 지난 2000년대 초반 이후 현대차가 디자인을 포함한 감성품질을 높이기 위해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은 곳이 폭스바겐이었죠. 폭스바겐은 다수의 인수·합병을 통해 업계에서 가장 훌륭한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구축했습니다.”

대부분 업체가 고급 브랜드 보유

글로벌 자동차회사들은 많게는 10개가 넘는 브랜드를 통해 다양한 계층의 소비자를 공략하고 있다. 글로벌 5위 안에 드는 자동차 회사들은 모두 다양한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폭스바겐의 경우 보유하고 있는 브랜드만 10개가 넘는다. 가장 대표적인 고급 브랜드가 아우디지만, 그 밖에도 포르쉐, 람보르기니, 벤틀리, 부가티 등 초고가 브랜드를 여럿 보유하고 있다. GM은 캐딜락을 앞세워 대중차와 고급차를 세분화해 판매하고 있다. 일본 자동차회사들은 미국 시장에 진출한 뒤 고급 브랜드를 따로 선보여 중저가 이미지를 벗는 데 성공했다. 도요타는 렉서스를, 닛산은 인피니티를, 혼다는 아큐라를 보유하고 있다.

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2014년 말 출간한 ‘자동차 제국’에서 “현대차그룹이 글로벌 톱5에 오른 데에는 기아차를 인수한 것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는 “현대차그룹은 이제 또 한번 과감한 인수·합병을 해야 한다”며 “해외 고급 브랜드를 인수해 브랜드 이미지를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인수·합병의 주된 목적은 몸집 불리기다. 자동차 산업은 규모의 경제가 필요하다. 생산과 판매가 많아야 대량 생산의 이점을 살릴 수 있다. 플랫폼 하나를 만들어서 여러 브랜드 차량에 돌려 쓸 수 있다면 효율성이 엄청나게 높아진다. 폭스바겐 자체 브랜드는 영업이익률이 6%이지만, 고급 브랜드인 아우디는 10%, 포르쉐는 18%의 높은 마진율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그 방증이다. 다양한 브랜드를 보유한 폭스바겐이 계속해서 인수 · 합병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대차와 달리 폭스바겐은 인수 · 합병에 나섰고, 중국과 인도 업체들도 매물로 나온 고급 브랜드를 흡수하며 사세를 키웠다. 현대차 제네시스 브랜드가 글로벌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는 아직 지켜봐야 한다. 자동차를 구매하는 소비자에게 브랜드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브랜드를 알리기까지 최소 5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다. 현대차가 해외 고급 자동차 브랜드를 인수했다면, 조금 더 빨리 프리미엄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하제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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