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와 야합, 권총 결투, 은행과 사기 그리고 개헌과 러닝메이트 제도. 난집합이 아니다. 19세기 초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먼저 선거부터 살펴보자. 1801년 2월 17일, 미국 대권의 향방이 마침내 갈렸다. 대통령 선거 결과가 발표된 1800년 12월 6일로부터 73일이 지난 시점.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빚어졌을까. 대통령을 뽑는 선거인단 투표에서 동점이 나왔기 때문이다. 제퍼슨과 아론 버(Aaron Burr) 후보의 득표 수가 똑같이 73표. 같은 당(민주공화파) 소속으로 연방파의 존 애덤스를 눌렀으나 선거인 몇 명이 착오로 잘못 투표한 탓이다.
결정권은 하원으로 넘어갔다. 제퍼슨과 버는 경쟁적으로 뛰었다. 목표는 하원의 16표(각 주당 선거권 1표) 중 과반인 9표. 첫 투표의 결과는 무효로 나왔다. 제퍼슨 8표에 버 6표, 기권 2표로 과반 미달. 무려 35차 투표에 이르기까지 같은 결과가 나왔다. 피를 말리는 양측의 싸움은 36차 투표에서야 가려졌다. 10표를 얻은 제퍼슨은 3대 미국 대통령에 올랐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초대 국무장관을 지냈다는 화려한 이력에 비하면 간신히 대통령직에 오른 제퍼슨은 이를 갈았다. 다득표자가 대통령, 2위 득표자는 부통령이 되는 선거법에 따라 부통령에 취임한 버를 노골적으로 따돌리고 3년 뒤에는 아예 헌법을 뜯어고쳤다. 12차 수정헌법의 골자는 정·부통령 후보에 대한 별도의 투표용지 채택. 대선 러닝메이트 제도가 이때부터 완전하게 자리 잡았다.
제퍼슨보다 더 분노했던 사람도 있었다. 분패한 버는 부통령직을 받아들이면서도 복수의 칼날을 세웠다. 대상은 알렉산더 해밀턴 전 재무장관. 자신의 패인을 해밀턴과 제퍼슨의 야합 탓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연방파의 지도자인 해밀턴은 제퍼슨을 밀었다.
캐스팅 보트를 쥔 해밀턴이 제퍼슨을 택한 것은 은행과 관련된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경험. 재무장관 재임시 수도를 남부에 가까운 지역으로 이전하는 조건으로 제퍼슨 국무장관에게 미합중국은행 설립 동의를 받아낸 경험에 비춰 대화가 가능한 상대로 여겼다.
두 번째 이유는 버와의 구원(舊怨)에 있었다. 재무장관 재임 시절 버가 설립을 주도했던 뉴욕 상수도회사가 실제로는 은행이었다는 점을 해밀턴은 잊지 않았다.* 허가권을 가진 재무부의 눈을 속인 버의 꼼수에 분개하던 해밀턴에게 하원 투표는 앙갚음의 기회였다. 양자의 악연은 1804년 권총 결투로 이어져 해밀턴은 버가 쏜 총알에 쓰러져 하루 뒤 목숨을 잃었다.
버의 인생 항로 역시 해밀턴과 결투 이후 뒤틀렸다. 살인자로 몰리면서도 간신히 부통령 임기를 채웠으나 중앙 무대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고향에 돌아간 버는 개인 군대를 조직해 멕시코를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우다 반역죄로 체포되는 등 불운의 세월을 보냈다. 말년에는 돈도 사람도 떨어져 가난하고 쓸쓸하게 죽었다. **
야당인 연방파는 부통령 지명 제도를 낳은 수정헌법에 반대했으나 결국에는 덕을 봤다. 공교롭게도 제퍼슨에게 패했던 애덤스 전 대통령의 아들이자 상원의원 시절 12차 수정헌법에 가장 반대했던 존 퀸시 애덤스가 이 법 덕분에 1825년 대통령에 선출된 것. 선거인단 투표에서 2위에 그쳤으나 과반 미달로 인한 재선거에서 4위 득표자의 도움으로 6대 대통령에 올랐다.
의회에서 자신이 반대했던 대로 법이 바뀌지 않았다면 부통령에 머물렀을 후보가 대통령이 된 셈이다. 득표 1위였음에도 눈앞에서 대통령직을 놓친 앤드루 잭슨은 다음 선거에서 대승을 거둬 백악관에 입성한 뒤 기득권층을 배제하는 정책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정리하면 미국의 정·부통령 선출 제도는 대권 경쟁 이전에 은행을 둘러싼 갈등과 야합, 꼼수의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이라면 미국의 옛날 방식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은 머리 속을 스친다. 득표 1위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2위 후보가 부통령에 취임한다면 정당간 극한 갈등과 제왕적 대통령의 부작용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소박한 기대에서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버가 설립을 주도한 ‘맨해튼 상수도 회사’는 기대를 모았었다. 뉴욕에는 식수가 부족했기에 해밀턴도 설립을 도왔다. 그러나 이 회사는 수도회사라는 간판을 유지하기 위해 조악한 상수도망을 깔았을 뿐 깨끗한 물 공급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정관에 ‘추가 조항’으로 끼워 넣은 ‘은행업’에서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버는 주가 상승으로 한 몫 잡았다. 맨해튼 상수도 회사 역시 몇 차례 합병을 통해 대형은행으로 발돋움했다. 체이스 맨해튼은행이 이 회사의 후신이다. 오늘날 상수도 회사의 이름은 JP 모건 체이스에 스쳐간 흔적이 남아 있다.
** 둘 다 독립전쟁 당시 대륙군 시절부터 장교로 복무했던 군인 출신이며 변호사였던 해밀턴과 버와의 표면적인 악연은 1791년부터 시작됐다. 뉴욕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버는 현역인 필립 슈카일러에게 승리를 거뒀는데 뒷말이 많은 선거였다. 해밀턴은 자신의 장인인 슈카일러가 ‘비열한 버의 부정선거’에 당했다고 여겼다.
해밀턴의 견제로 대통령의 꿈을 눈 앞에서 놓친 버는 부통령으로 지내면서도 늘 불안에 떨었던 것 같다. 제퍼슨이 헌법을 개정해 자신을 부통령 후보로 재지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 버는 1804년 초 뉴욕주 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떨어졌다. 낙선으로 버의 해밀턴에 대한 원한은 더욱 깊어졌다. 선거 패인이 이번에도 해밀텅에게 일부 있었기 때문이다. 해밀턴은 ‘버는 사기꾼이자 성격 결함자’라고 비난해 버 진영의 분노를 샀다..
미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권총 대결로 손꼽히는 ‘해밀턴-아론 결투’도 이런 맥락에서 일어났다. 1804년 초여름 어느 파티장에서 ‘맨해튼 상수도 회사는 버의 사기작’라는 해밀턴의 비난을 들은 버는 눌렀던 감정을 폭발시켰다. 허드슨 강가에서 벌어진 결투에서 해밀턴은 간과 척추에 치명상을 입고 이튿날 숨졌다. 초대 재무장관으로서 연방정부의 힘을 키우고 국내 유치산업 보호에 힘썼던 해밀턴은 10달러짜리 지폐에 그 얼굴이 전해져 내려온다.
*** 윌슨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토마스 마셜이 자주 들먹인 농담. ‘형제 둘이 있었는데 형은 어부가 되어 바다로 나갔다. 정치에 입문한 동생은 부통령이 됐다. 그 후 아무도 그 형제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존슨 대통령 시절 험프리 부통령은 ‘눈보라 속에서 헐벗고 떨어도 아무도 성냥불 하나 주지 않는 자리가 부통령’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법적으로는 상원의장으로 사회권 정도가 고작이지만 막강한 권한을 승계받을 수도 있다. 선거를 거치지 않고도 대통령직에 오른 제럴드 포드의 사례가 유사시 부통령 자리의 의미를 말해준다.
1973년 12월 미국 닉슨 대통령은 뇌물사건에 휘말린 끝에 탈세 혐의를 덮어주는 조건으로 사임을 택한 애그뉴 부통령 후임에 제럴드 포드 하원의원을 지명했다. 8개월 뒤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 위기에 몰려 사임하자 포드는 대통령직까지 물려받았다. 사상 처음으로 선거도 없이 대통령이 된 포드는 부통령에 넬슨 록펠러를 지목했다. 이후 2년 반 동안 미국은 선거를 치르지 않은 정·부통령 시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