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군살빼고… 미래 먹거리 찾고… 중후장대 '첨단변신' 속도낸다

정유업계에서 25년 이상 근무한 이 모 상무는 요즘 신입사원 시절을 가끔 떠올린다. 당시엔 지금보다 사업이 편했다. 정부의 ‘유가 고시제’에 따라 평균 영업이익이 보장됐다. 지금처럼 국제 유가 변동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 막 시작한 석유화학 사업도 중국 경제의 성장을 따라 눈부시게 성장했다.

하지만 이제 꿈 같은 이야기다. 정유업계는 경기침체와 중국의 정유·석유화학 자급률 포화로 지금 사업 구조로는 도무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인식이 만연하다.


정유업계와 함께 대표적인 고연봉 직장으로 꼽혔던 조선·철강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 상무는 “중후장대 산업에게 현 불황 국면은 죽느냐, 사느냐의 고빗길에 서 있게 만들었다”며 “‘날렵한 첨단 기업’으로 변모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절박함을 전했다.

18일 업계에 따르면 GS칼텍스는 최근 내부적으로 탄소섬유보다 복합수지 사업에 초점을 맞추기로 방침을 바꿨다. 복합수지는 고성능 플라스틱을 만드는 데 쓰이는 소재다. 여전히 일부 연구개발(R&D) 인력이 탄소섬유 연구를 이어 갈 예정이지만, 상위 카테고리인 복합수지에 더 많은 인력과 자원을 투입키로 했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 속에서 탄소섬유 시장의 성장도 느린 탓에, 빠르게 사업 전략을 수정한 것이다.

이는 정유업뿐만 아니라 석유화학, 철강·조선을 포함한 소위 ‘중후장대’ 산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포스코는 지난해에만 46건의 구조조정을 완료하는 등 군살을 쳐낸 대신 고부가 제품, 자동차 강판 등에 집중키로 했다. 전기차 배터리 소재인 리튬 사업 등 향후 전망이 밝은 신사업 육성에도 착수했다. 기존의 고수익 사업과 신사업의 투트랙 전략으로 난국을 돌파한다는 전략이다. 동국제강은 컬러강판과 코일 철근, 대우조선해양은 천연가스 추진 엔진을 갖춘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등을 신사업으로 지목하고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10, 20년 단위로 느리게 움직였던 중후장대 업종들이 요즘엔 수시로 사업 재편을 통해 활로를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후장대 업종의 변신은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인력과 조직을 슬림화하고 비주력 사업은 알짜라도 매각하는 것이 수순이다. 야심 차게 시작한 신사업이라도 시장 상황에 맞춰 신속하게 정리하는 전략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수년간 이 같은 과정을 통과한 국내 중후장대 기업들은 이전보다 가볍고 빨라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력 구조조정을 가장 큰 폭으로 단행한 업종은 철강·조선이다. 포스코는 이달 초 실시한 정기 임원인사에서 임원을 30% 줄이고 조직의 22%를 없앴다. 지난해 연결 기준으로 사상 첫 순손실을 기록한 만큼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든 셈이다. 현대중공업도 지난해 과장급과 고참급 여직원 등 1,500여명에 대한 희망퇴직을 단행했다. 임원 수도 30%가량 축소했다.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역시 임직원 수가 크게 줄었다.

인력뿐 아니라 조직도 환골탈태했다. 현대중공업은 플랜트사업본부와 해양사업본부를 통합했다. 풍력 기어박스를 생산하는 독일 야케법인, 건설장비 엔진을 생산하는 현대커민스, 태양광 모듈을 생산하는 현대아반시스 등 비핵심 조직도 청산하기로 했다. 포스코는 오는 2017년까지 국내 계열사는 50%, 해외사업은 30%를 줄일 계획이다.

정유·석유화학 업계는 눈에 띌 만한 규모의 인적 구조조정은 없었지만 조직개편은 활발했다. SK이노베이션의 자회사인 SK에너지는 올해 초 조직개편에서 해외사업 확대를 위해 글로벌사업개발실을 신설했다. 또 다른 자회사인 SK종합화학은 중국에서 승부를 보기 위해 현지에 전략본부와 글로벌성장추진실을 만들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각종 비핵심 사업·자산을 매각한 데 이어 최근에는 TAC필름사업도 정리하기로 했다.


OCI는 알짜 자회사인 OCI머티리얼즈·OCI리소시즈 등을 잇따라 매각했다. 주력인 베이직 케미컬, 태양광 등 에너지솔루션사업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이 밖에 지난 2014년부터 한화·롯데가 잇따라 대규모 인수합병(M&A)을 실시하면서 국내 석유화학 업계의 지형 자체가 바뀌기도 했다.

관련기사



정유 업계는 요즘 예전과는 전혀 다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경기침체와 후발주자들의 거센 추격 속에서 이전처럼 회사를 경영했다가는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짙다.

외형적 변화는 사업전략의 변화로도 이어졌다. 롯데케미칼은 삼성정밀화학 등을 인수하면서 정밀화학으로 사업 다각화를 이루게 됐다. 롯데케미칼은 그동안 범용제품 위주로 사업을 운영해 중국 후발주자와의 경쟁이 심화하던 참이었다. 정밀화학 분야에 진출하게 되면서 격차를 벌릴 수 있게 됐다.

롯데케미칼에 케미컬사업 부문을 매각한 삼성SDI도 사업재편을 하고 있다. 케미컬사업을 정리하고 전자재료·전지사업에 집중할 계획이다.

동국제강은 지난해 8월 190만톤 규모의 포항2후판공장을 정리하고 대신 새 먹거리가 될 컬러강판과 코일철근에 집중 투자하기로 했다. 부산공장의 컬러강판 생산을 15%가량 늘리기 위해 올 하반기까지 250억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단일 컬러강판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SK이노베이션은 17일 메르세데스벤츠의 첫 전기차에 배터리를 공급하기로 하면서 미국·중국·유럽의 최고 자동차 기업 모두와 공급계약을 맺은 ‘3관왕’이 됐다. 한 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사업 철수설까지 도는 등 신사업에 대한 불안감이 많았지만 어느 정도 사업이 궤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SK이노베이션은 베이징자동차와 합작사를 설립하고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으로 떠오를 중국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지난해 최악의 위기를 겪은 대우조선해양은 본사 사옥까지 매물로 내놓은 채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시장에서 분투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LNG 운반선 기술력을 앞세워 명예회복에 나설 방침이다. 기존 LNG선보다 효율성을 대폭 높인 재액화장치(PRS)와 천연가스 추진 엔진이 무기다.

대우조선의 한 관계자는 “2000년대 초반 위기의 돌파구를 LNG선에서 찾았는데 이번 위기도 LNG 신기술로 극복할 것”이라며 각오를 다졌다.

이들 기업의 변신은 아직 불안정하나마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동국제강은 지난해 영업이익 1,965억원을 기록하며 1년 만에 흑자 전환했다. 2014년 6월 채권단과 재무구조개선약정을 맺는 등 유동성 위기를 겪었지만 지난해 2·4분기부터 3분기 연속 흑자 달성에 성공한 덕이다. 특히 후판 구조조정이 기여한 바가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포스코도 지난해 전반적으로 실적이 부진했지만 영업이익률(별도 기준)이 전년보다 0.7%포인트 증가한 8.7%를 기록하며 선전했다.

다만 안심하기는 아직 이르다. 위기에 닥쳐서야 구조조정·사업재편에 나서는 방식은 회사와 임직원 모두에 피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꾸준히 포트폴리오 개편을 통해 200년 넘게 번창한 듀폰 같은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내 중후장대 기업 가운데선 LG화학이 비슷한 사례다. 1947년 화장품(럭키크림) 생산으로 출발한 LG화학은 화장품 용기, 플라스틱, 생활용품, 정보전자소재, 배터리 등으로 꾸준히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한 덕에 현재 국내 화학 업계에서 가장 안정적인 사업구조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주희·임진혁기자 ginger@sed.co.kr

유주희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