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피플

[문병도의 썸타는 토크]"테러 방지법 고발? 절 도와주는 거죠"-양향자 더불어민주당 광주서을 후보

30년 동안 검증받아…끊임없이 도전하며 넘어서

고호녀 편견 깨고 '삼성의 별' 임원으로 발탁돼

더민주 입당제의, "정치를 밝게 하고 싶다" 며 투신

"악수하는 손이 점점 따뜻해 지고 있다"며 힘내



서울경제의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 ‘서울경제 썸’이 화제와 이슈가 되는 인물을 찾아가는 인터뷰 코너 ‘문병도의 썸타는 토크’ 를 만들었습니다. 이번 코너는 이슈 인물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묵묵히 소임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도 찾아가 그들의 애환과 소망 등도 가감없이 담을 예정입니다.

그 첫 번째로 이번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여성 인재 영입 1호로 전략공천한 양향자(49) 더불어민주당 광주 서을 후보를 만났습니다. 고졸 출신 여성으로서 온갖 역경을 딛고 삼성전자의 여성 임원이 되기까지, 그녀의 성공 스토리와 그 뒷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리고 돌연 정치에 입문한 배경과 정치를 하며 이루려 하는 것들을 묻고 싶었습니다.


“겁도 없이 사내 일본어 학습반에 들어갔다. 고졸인 네가 공부할 수 있겠느냐는 강사의 비아냥거림과 대졸들의 텃세를 견디며 공부했다. 주말에도 기숙사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결국 가장 먼저 일본어 자격증을 땄다. 일본어를 기막히게 하는 여사원이 있다는 소문이 났다. 연구원들이 일본 서적을 들고 찾아왔다. 자료를 밤새워 번역하면 반도체 설계에 대한 이해는 덤으로 따라왔다. 어느덧 반도체 설계 업무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 됐다. 삼성의 첫 번째 고졸 엔지니어가 됐다. 메모리 설계 전문가로 메모리 제품설계 자동화추진을 통해 개발기간 단축에 기여했다. 마침내 ‘삼성의 별’이라는 임원을 달았다. 남들보다 1년이나 빠른 ‘발탁 승진’이었다.”

양향자 후보 측에서 보내준 라이프 스토리의 일부입니다. 이를 읽으면서 더욱 더 양향자 후보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었습니다.

양향자 후보와의 인터뷰는 어렵게 성사됐습니다. 광주에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중,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 틈을 내서 여의도의 한 호텔 카페에서 양향자 후보를 만났습니다.

▲바쁘신데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지 동향은 어떠한가요?

-며칠동안 경로당을 쭉 다니는데, 첫날보다 다음날 다르고, 그 다음날 다르고 , 악수하는 손이 점점 따뜻해져요. 처음에는 전혀 저라는 사람 몰랐다가 다음날 보니까 그사람이 그사람인가. 그 다음날은 “어 그래.” 그래서 너무 좋아요.

▲눈물의 입당회견이 기억납니다. 당시 심정은?

(지난 1월 12일 양후보는 입당회견을 했다. 당시 눈물을 흘려 화제가 되었다.)

-30년 일했지 않습니까. 정치라는 곳에 온다라는게. 너무나도 주변에서 다 반대하잖아요. 다 반대하는데 혼자서 결정을 해야 되잖아요. 너무 외로웠어요. 그리고 입당 기자 회견문을 전날 쓰면서도 내내 눈물이 나서 못쓰겠더라구요. 그래서 다 울었는 줄 알았는데, 그날 기자회견장에서 또 눈물이 나는 거예요. 30년 회한도 들고, 이제 어느 정도 꿈을 이뤘는데, 또 다른 꿈너머 꿈을 향해서 간다고 생각하니까. 좀 두렵기도 하고, 아무튼 만감이 교차했어요.

▲정치 입문한지 두달 되셨죠. 어느 인터뷰 보니까 “힘든줄 모르겠다”고 했는데 요즘도 그런지 궁금합니다.

-저는 워낙 새로운 사람들 뵙고 새로운 거 공부하는 거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모든게 다 새롭고 너무 좋습니다. 몸은 좀 힘드네요. 새벽 여섯시에 나가서, 거리의 사람들에 인사하고 지나가는 차에 인사하고, 그런게 어색하긴 한데, 하루가 금방 가요. 그리고 50일 됐을때는 5년 된 거 같다고 그랬고, 두달 되니까, 20년 된 것 같고 그렇습니다. 하루하루가 역동적이네요. 노인정이 227개인가 그런데, 아직 반도 못돌았어요. 문제점을 정말 많이 느껴요. 취약계층이 너무 많습니다. 현재의 노인 정책이 노인들을 정말로 무기력하게 만드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산업 자체가 광주가 참 취약해요. 청소년 문제도 그렇고...빨리가서 진짜 내가 국회의원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너무 간절히 듭니다. 소명의식이 너무나 생기고 있어요.

▲대기업 떠나 정계에 입문했는데, 주변 반응은 어땠습니까?

-처음에는 보따리 싸들고 말렸죠. 근데 말릴 겨를이 없었어요. 왜냐면 입당 기자회견을 하기 전날 제가 4시쯤 퇴임사를 썼거든요. 아무도 몰랐어요. 우리 아이들 조차도 몰랐으니까요. 남편은 알고 부모님도 몰랐어요. 아무한테도 얘기 안했어요. 그리고 회사에도 HR담당하는 임원 한분한테만 얘기했습니다 물론 급속도로 펴졌죠.

전날 아침에 출근해서 내일 입당 기자회견을 해야 한다고, 죄송하다고 이야기하고, 그날 퇴임서를 제출하려고 하니까 절차가 있잖아요,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할수 없이 당에서 삼성에다 연락을 한 것 같더라구요, 퇴직처리를 해달라고, 그래서 일사천리로 마무리 됐죠.

▲정치를 하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예전부터 생각이 있었는지요?

-생각이 없었습니다. 동기는 입당 제의를 너무 강하게 해온 것입니다. 하지만 수락은 되게 어려웠어요. 외롭다는 생각을 했는데, 어차피 내가 결정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이 50에 임박하니까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요. 인생 후반기를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사실은 많이 했었어요.

그리고 삼성에서 임원이 됐을 때도, 굉장히 이슈가 됐었잖아요. 나는 많이 받았거든요. 그래서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떤 형태로든 저는 그것을 삼성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후배 멘토링 등을 구체적으로 실천을 하기도 했었지요.

입당 제의받고 고민하고 있다 보니까 삼성 안에서의 일 뿐만 아니라 이게 국민을 향해서 하라는 얘긴가,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결국은 좋은 의미로 정치는 봉사 잖아요. 이제 제가 임원 3년차 들어가는데 아까워요. 그런데 예를 들면 4년뒤에 다시 선거가 있고. 그땐 전무쯤 되겠죠. 근데 나의 열정이 그렇게 남아 있을까. 이미 그때는 삼성 임원으로 기득권에 빠져 있을텐데...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에 더불어 민주당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정치를 하면서 이루려고 하는게 무엇인지요?


-삼성에서 일을 하면서도 제가 뭘 이뤄야 하겠다 하면서 한 것 같지는 않아요. 제품이 제대로 개발됐을때 그게 또 판매로 이뤄지고, 그게 성과로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그 자체가 좋은 거예요. 그래서 공부하고, 임원 돼서도 계속 박사과정 하려고 했던 거구요. 계속 공부하는 그 자세가 너무 좋고, 그 자체로 좋았지, 제가 뭘 이루려고 하는게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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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전 지금 당장 돌아봐야 할게 너무 많아요. 그리고 광주를 샅샅이 돌꺼예요. 나 혼자만으로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정치라는게 이런 거구나, 좋은 건데 우리는 그동안 그렇게 진흙탕이고 악의 근원이고, 악의 축이고, 비리의 온상이고 그랬을까. 가정에서도 정치고, 친구들한테도 정치고, 사는게 정치잖아요. 그 정치라는 이름이 왜 이렇게 돼 버렸을까, 그 정치를 밝게 하고 싶어요.

▲보통 삼성 출신이 정치를 하면 새누리당으로 갈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더민주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택한 게 아니라 선택 당한거죠. 딴 데서는 오란 소리를 안했어요. 그리고 저는 당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었어요. 얘기를 늘 했어요. 반도체 개발하는데 무슨 당이 필요있냐 이런 생각을 했는데, 젊은 층은 진보적인 성향이 있고, 그건 저도 그래요. 근데 이념적으로 그렇게 강하지 않아요. 30년을 기술개발자였기 때문에 경제쪽에 산업쪽에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정치의 이념으로 더불어민주당이냐, 새누리당이냐 이런 걸 생각해본 적은 한번도 없어요.

▲더민주 입당의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입당 제의가 왔었고, 그게 굉장히 강렬하게 왔다는 거, 그리고 멈추지 않을 거라고 느껴졌습니다.

남편은 삼성에 있었어요. 저보다 조금 먼저 회사를 나왔어요. 제가 임원되고 한 일년 반 만에 본인도 본인 일을 해야겠다고 해서 삼성을 나왔어요. 같은 반도체인데 남편은 프로세스 공정, 나는 설계, 그러니까 환상의 조합이죠. 남편 태어난 곳이 거제예요. 선산은 다 거제에 있구요. 초등학교 1학년때 어머니가 교육 때문에 부산으로 왔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문재인 대표님도 아마 어린시절 거제도로 피난가서 사셔서 그런지 남편과 정서가 비슷하더라구요. 그리고 문 대표님이 호남에 대해서, 광주에 대해서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며 간곡하게 부탁을 하시더라구요. 국민을 위해서, 국민 정치 등 등 이런 말이 제겐 아직도 익숙하지 않아요. 그런데. 좋은 삶일 거 같아요, 나쁘다면 좋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죠.



▲천정배 의원 지역구에 공천됐습니다. 자객 공천이란 말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며칠전에 방송에서 자객이란 의미를 아느냐고 말했습니다. 사람 죽이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정치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분들에게 품격 있는 언어를 써달라.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보여질 것 같긴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지요. (천의원은) 정치의 큰 어른이시고, 저는 이제 두달 된 신인이구요. 또 그렇기 때문에 대립적인 부분이 그런 언어를 쓰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서구는 제가 고등학교 다닐때 남동생하고 자취를 했던 곳이고, 3년 내내 서구에서 살았었어요. 여상은 그때 풍양동에 있었구, 버스타고 다녔죠. 통학했었습니다.

▲여성 성공신화의 대표적인 인물이십니다. 고졸출신이라는 편견도 깨셨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입니까?

-지금도 고졸 호남 여성, 삼박자죠 고호녀. 근데 사실은 제일 힘들었던 부분을 생각해보면 여상을 나와서 반도체 설계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제가 뭘 모르는 거, 기술을 모르겠고, 수학물리화학을 공부해야 하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상업계 고등학교에서는 일주일에 딱 두시간 수학, 한시간 물리, 한시간 화학, 한시간 생물 이래요. 나머지는 주산, 부기, 타자 그런 공부를 하고, 수학 미적분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공부를 새로 시작했었어야 했고 결혼도 빨리 했어요. 스물네 살에. 공부하고 결혼하고 아이 키우고 일하고, 시부모님 모시고 살고, 뭔가 치열했죠.

30년 내내, 제일 힘들었던 것은 남들은 쉽게 넘어가는 것들을 나는 검증에 검증을 거쳐야 했어요. 30년 동안 검증을 받아왔어요. 이 사람이 할 수 있을까. 프로젝트 리더를 시킬려고 하는데 여성이어서 될까. 밑에 남자들이 따라올까. 그런 거에 대한 의문이 계속 있는거죠. 처음에는 결혼하고 이 사람이 회사를 다닐까. 아이 낳고 다닐 수 있을까. 제대로 회사 생활할 수 있을까. 고졸인데 제대로 헤쳐 나갈 수 있을까. 30년 내내 검증인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도전하며 사는걸 워낙 좋아해서 ‘안된다는 생각을 버려라’ 그런 생각을 가졌었기에 그 당시에는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보다, 내가 해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랬던 것 같습니다.

▲방목형 육아라고 들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떤 주관을 가지고 어떻게 키우셨나요?

-제가 너무나 시간이 없으니까 짧은 시간이라도 있을때마다 굉장히 엄마에 대한 임팩트를 줬던 것 같습니다. 유년기에는 같이 있는 얼마 안되는 시간에 등도 긁어주고, 귀도 후벼주고, 온몸 맛사지 해주고, 노래도 불러주고, 이러면서 잠들게 하고, 그게 매일 삼십분쯤 됐어요. 딸도 짧은 시간 같이 웃고, 이야기 들어주고. 방목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부모가 열심히 살면 아이들도 그대로 따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열심히 사는 모습이 아이들에게는 교육이지 싶었어요. 딸은 대학원 다니고 아들은 이번에 대학 들어갔어요. 사년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엄마가 백수될 줄 알고, 등록금은 하나도 안내고 아르바이 합니다. 너무 착하고 좋죠.

▲보수단체가 양후보의 테러방지법 발언을 문제삼아 고발했습니다.

-그건 저를 도와주는 겁니다. IT업계의 눈으로 테러방지법을 보면 굉장히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테러방지법은 숙고해야 합니다. IT업계를 육성하고자 하는 박근혜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테러방지법을 다시 한번 숙고해야 한다는게 저의 워딩이었는데, 저는 보수 단체에서 뭘 고발했는지, 뭘 가지고 고발했는지, 그래서 보수단체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를 요즘에는 관심 갖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박원순 시장님도 시장 선거 때 27건을 고발당했더라구요. 진짜 많은데,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냥 계류 됐다가 끝나는 거예요. 저는 감사하고 있어요. 고발 사건이 발생하면 정부가 한번 더 그게 뭔가 하고 보면 좋은 거고, 국민들이 그것에 대해서 심각성을 느끼면 더 좋은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편안하게 하고싶은 말씀을 나눠주십시요.

-오늘도 비대위에서 청년투표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청년 투표율이 굉장히 낮아요. 제 지역구에서도 20, 30대 40대 까지는 제가 많이 선전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청년들은 투표를 많이 안하잖아요. 제가 삼성에서 30년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뭐였냐 하면, 제 할 일은 확실하게 한다 그리고 확실하게 내가 할 거 하고 그 다음 얘기한다 였습니다. 그래야 먹힐 거 아닙니까? 저도 정말 정치에 관심 없었고, 사업보국, 그러니까 보국하는 의미가 저는 기술 개발해서 사람들이 윤택하게 살면 그게 보국인줄 알았는데, 이제 정치에 관심을 갖고 나서보니 정치참여가 중요하다는걸 정치에 와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투표를 하면서, 우리가 목소리를 내는 겁니다. 국민들이 4년마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게 투표잖아요. 저 같은 신인들이 뭐를 알겠습니까, 같이 해주셔야지요. 그래서 꼭 동참해주시길 바랍니다.

사회적 제약으로 인해 젊은이들에게 많은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시대라고 합니다. 하지만 고졸 출신이라는 벽을 허물며 꿈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성취했으며, 이제 성취한 것을 정치를 통해 사회에 환원하려고 하는 양향자 후보의 스토리와 꿈이 많은 분들에게 힘이 되길 바랍니다. 사진=송은석기자

문병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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