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1일 오전 일본 가나가와 현 사가미 만을 진앙지로 발생했던 간토대지진.
지진이 발생한 이후 요코하마 인근에서 생긴 혼란을 틈타 조선인들이 방화를 일삼고 있다는 소문이 피해지에 퍼졌고, 조선인들이 ‘강도 짓을 했다’, ‘우물에 독극물을 탔다’, ‘수백명이 민가를 습격했다’ 등 내용이 점차 부풀려져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이 과정에서 폐허가 된 마을에서 사람들은 우유나 신문 배달부가 빠른 배달을 위해 표시해둔 기호를 발견하고 이 기호를 습격할 대상이나 방화 계획을 알리기 위한 암호라고 멋대로 해석했다. 결국 조선인 폭동설은 소문이 아니라 구체적인 근거가 있는 사실로 둔갑했고, 수천명의 조선인들이 어이 없는 소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정보인 소문은 많은 이들에게 그럴싸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확산 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노엘 캐퍼러가 말했듯 소문은 ‘가장 오래된 미디어’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점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국내에서도 최근 지카바이러스와 관련된 소문이 퍼졌다. ‘우리나라 모기도 지카바이러스를 옮긴다’, ‘지카바이러스는 예방과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유언비어가 소셜미디어네트워크(SNS)를 통해 퍼졌다.
전문가들의 해명으로 이 같은 소문은 점자 잦아들었지만, 이 소문은 우리가 여전히 소문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켜 줬다.
‘소문의 시대’는 사회심리학을 전공한 저자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영향을 미쳐왔던 소문들과 다양한 미디어를 만나며 변화한 소문의 변천사 등을 폭넓게 다룬 ‘소문 백과사전’이다.
다양한 소문 사례를 제시하며 저자는 소문에 숨겨진 텍스트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예를 들어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당시에는 ‘군대에서는 말도 사탕을 먹는다’, ‘순사의 아내는 대기근 중에도 어딘가에서 몰래 쌀을 빼 온다더라’ 등의 소문이 퍼진다. 이 같은 소문에는 불안한 민심이 반영됐다.
1990년대 초 일본 전국 각지에서 확산된 ‘일본 여성이 외국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소문을 통해서는 소문에 숨은 차별 의식이 담겨 있을 수 있음을 알려 준다.
이밖에 일본 전역을 떠돈 도시괴담 ‘입 찢어진 여자’부터, 학교에 유령이 나타난다는 학교 괴담까지 다양한 소문들을 보여준다. 저자는 소문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소문과 진실을 구별하는 법, 소문이 퍼진 이유와 그 안에 담긴 맥락까지 짚어낸다.
저자는 괴담이 다른 지역에도 있을 경우에는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아울러 소문의 강도와 유포량은 문제의 중요성과 그 논제에 관한 증거의 애매함의 곱셈에 비례하기 때문에 소문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애매함에 대한 내성을 기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장기적으로 애매함을 줄이기 위해 각종 정보를 수집할 경우 소문과 사실을 구분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소문이 퍼지는 이유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간다. 소문은 알고 싶은 욕구, 말하고 싶은 욕구, 다른 사람과 이어지고 싶은 욕구에서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저자는 소문은 없앨 수도 없고, 없애서도 안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간토대지진 등 잘못된 소문이 초래하는 결과는 무섭지만, 소문을 잘 거른다면 소문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좋게 해 주는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가장 오래된 미디어인 소문은 앞으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을 맺어나갈 것이며, 다양한 뉴미디어를 통해 소문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을 바꿔 갈 것”이라고 말한다. 1만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