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얼마 전 사석에서 영화계 지인은 한숨을 토한 뒤 말했다. “한국 영화산업이 중국에 꽤 앞서 있다고 생각했던 게 언젠데 중국은 벌써 넘볼 수 없는 지경으로 앞질러 가버렸어요.” 미술계 인사의 푸념은 더 극명했다. “10년 전 한국 미술의 위상이 지상 1층에 중국 미술이 지하 1층 이하였다면, 지금은 한국이 여전히 지상 1층인 반면 중국은 지상 100층까지 달아난 꼴이에요.”
글로벌 문화예술계에 차이나머니의 공세가 무섭다. 수년 전 미국 2위 영화관 체인 AMC를 인수했던 중국 완다그룹은 올해 초 영화 ‘고질라’의 제작사인 레전더리엔터테인먼트를 사들이더니 최근에는 카마이크시네마까지 매수해 북미 최대 극장체인으로 떠오를 태세다. 미술품 경매시장에서도 중국인은 ‘최대의 큰손’이다. 얼마 전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작품 ‘누워있는 나부’가 역대 두 번째로 높은 값에 중국인에게 낙찰된 것을 비롯해 빈센트 반고흐의 ‘데이지와 양귀비꽃이 담긴 병’, 파블로 피카소의 ‘클로드와 팔로마’ 등이 고가에 중국인 새 주인을 만난 지 오래다.
국내라고 차이나머니가 잠잠할 리 없다. 특히 엔터업계에서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초록뱀미디어와 김종학프로덕션·SH엔터테인먼트그룹 등이 중국자본의 수중에 들어갔고 국내 엔터사에 대한 지분투자도 빠르게 유입되고 있다. 가수 더원과 황치열 등이 중국 직행을 선택한 것도 따지고 보면 차이나머니의 힘이다.
안팎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문화예술계 곳곳에서 차이나머니에 대한 경계론이 터져 나온다. “이러다가 왕서방에게 다 먹히겠다” “중국자본이 결국 단물만 빨아먹고 ‘먹튀’가 될 거다”는 등의 우려가 바로 그것이다. 일리가 있는 걱정이다. 그러나 지금은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위험요소를 줄이고 기회를 확대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문화예술의 글로벌화가 날로 가속화하는 현 상황에 국내 문화예술계는 자금과 시장규모 면에서 성장 한계에 직면해 있으며 중국자본이 돌파구를 열어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지가 9일자 1면에 단독보도한 ‘토종 애니 머털도사 中자본 업고 100억대 블록버스터로’는 모범적인 사례로 꼽을 만하다. 국산 애니메이션이 중국 자본을 유치해 관객규모와 자금력의 한계를 딛고 디즈니나 픽사에 맞설 수 있는 100억짜리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을 만들 기반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 제작사 뉴(NEW) 또한 성공모델을 보여줬다. 2대 주주인 중국의 화처미디어와 협업을 통해 한국과 중국의 동시방영을 성사시킬 수 있었고 이는 총제작비 130억원에 전체매출 190억원, 총투자이익 30억원의 대박을 쳤다.
‘왕서방 돈’이 무섭다고 벌벌 떨기만 하고 문을 걸어 잠가서는 곤란하다. 도리어 ‘머털도사’나 ‘태후’와 유사한 성공사례들이 계속 나올 수 있도록 지혜를 모으는 편이 현명한 선택이다. 그래야 할 또 다른 이유는 문화예술이 제조업에 비해 고용창출 면에서 월등한 효과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문화예술 분야에 10억원을 지출하면 나타나는 취업유발 효과는 17.2명으로 제조업(9.4명)보다 훨씬 높았다.
그런데도 차이나머니의 손을 잡기에 주저할 것인가. 글로벌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는 시대다. 성장한계에 직면한 문화예술계를 세계 속에 우뚝 세우고 국민경제의 활로까지 열 수 있다면 그것이 ‘왕서방의 돈’이든, ‘김서방의 돈’이든 상관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자각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오늘의 지구촌은 해마다 3만편의 영화와 200만권의 책, 10만장의 음반이 쏟아지고 9,500만명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는 문화예술의 전성시대다. 더 늦기 전에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발전을 위해 개방적이면서 담대한 플랜을 새롭게 가다듬어야 한다. hnsj@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