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화폐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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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1만원권 발행이 공고된 1972년 4월. 아시아개발은행(ADB)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 준비를 하던 김성환 한국은행 총재가 갑자기 기자실을 찾았다. 석굴암 석가여래좌상(전면)과 불국사(후면)를 모델로 한 1만원권 도안에 대해 기독교계가 크게 반발하자 헐레벌떡 달려온 것. “종교적 관점에서 이뤄진 게 아니다” “세계적인 문화재 석굴암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명하기는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틀 뒤 “1만원권의 도안을 각계각층의 의견을 참작해 재검토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졌고 결국 당시 최고액권의 모델은 세종대왕 초상(앞면)과 경복궁 근정전(뒷면)으로 바뀌었다. 세종대왕이 우리나라 제1의 화폐 모델로 등극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다.


화폐의 모델은 나라 발전에 공헌하거나 대표성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 게 보통이다. 위인이나 왕·대통령 등을 내세워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 권위를 표현하고 이를 통해 화폐의 가치를 보증하겠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평가다. 모델로 선정되는 것 자체가 영광인 이유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는 대혁명 와중에 마부로 변장해 국외탈출을 시도했지만 화폐에 새겨진 그의 얼굴을 알아본 농부의 제보로 단두대에 서야 했다. 해방 후 1960년까지 우리나라 지폐 모델을 독점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초상도 4·19 혁명 이후 모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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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가 20달러 지폐 모델을 무려 88년 만에 앤드루 잭슨 7대 대통령에서 여성 인권운동가로 바꾸려 한다는 소식이 외신을 타고 전해졌다. 남부를 거대한 목화농장으로 바꾸기 위해 인디언 이주법을 제정해 원주민들을 내쫓고 흑인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게 잭슨 초상을 퇴출하는 이유라고 한다. 반면 10달러 지폐 모델인 알렉산더 해밀턴 초대 재무장관은 노예제를 반대한 덕에 건재할 것으로 보인다. 천하의 전쟁 영웅이라 해도,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잘못된 과거사는 꼭 바로잡는 존재. 역사는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송영규 논설위원

송영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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