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김창일 (주)아라리오 회장 "30년 꿈꾸온 뮤지엄 열었지만…진짜 꿈은 이제 시작

[CEO&Story]



‘촉 비상한’ 컬렉터에서 CEO·작가까지

남다른 感으로 손대는 일마다 승승장구


옛 공간 사옥·제주에 5개 뮤지엄 운영

“미술관도 갤러리도 여전히 적자지만

힘든 산 오르는 마음으로 즐기며 일해

세상과 교감할수 있는 미술관 짓고 싶어”

인터뷰를 위해 제주에서 날아온 그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꺼낸 것은 명함이 아니라 불긋한 물이 들어 우글거리는 냅킨 3장이었다. “이게 무엇으로 보입니까”라며 묻는 그에게 인주(印朱) 닦은 휴지 아니냐고 답했더니 껄껄 웃는다.

“딸기 드로잉입니다. 씻은 딸기를 내 온 바구니 아래에 깔려 있던 게 이렇게 고운 색으로 모양을 내더라고요. 우연히 만들어진 것도 재미있었지만 일부러 딸기 배치를 달리해 형태도 한번 만들어봤어요.”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타박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버려진 것에서 가치를 찾고 부질없는 것에서 심오한 의미를 찾아내는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그는 세상을 보는 태도 자체가 달랐다. 연 매출 3,500억원의 중견기업인 ㈜아라리오의 회장이자, 일군의 아라리오 갤러리와 뮤지엄을 세운 관장이자, 전 세계 200명 안에 꼽히는 안목 있는 컬렉터이자, CI KIM이라는 이름으로 2년에 한 번은 꼬박꼬박 개인전을 열고 있는 작가로 사는 김창일(65·사진)이다. 제주 작업실에서 지내다 온 그를 서울 종로구 율곡로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만났다.


‘촉’ 좋은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은 시작부터 특별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그에게 어머니는 빚 대신 받은 천안 고속터미널 사업을 넘겨줬지만 조건은 가혹했다. 터미널은 매달 300만원의 적자였고 월세 300만원은 어김없이 내야 한다고 했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이었다. 인수인계를 앞둔 그는 전국의 터미널을 모조리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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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어디로 몰리나 봤습니다. 껌 팔고 음료수 파는 매점 앞에 줄을 서더군요. 매점을 직영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터미널들은 매점을 임대방식으로 운영했거든요. 그렇게 매점을 직영하면서 6개월 만에 월 600만원의 흑자기업으로 돌아섰고 이듬해부터 억대를 벌어들였습니다. 스물아홉이던 내 책상에는 늘 현금이 쌓여 있었죠.”

사업을 시작하던 그 무렵 미술품 수집도 시작했다. 휘문중·고를 다닌 그의 등하굣길은 안국동과 닿아 있었고 화랑과 그림은 친숙했다. 지난 1978년 가을께 홀리듯 매료돼 청전 이상범과 남농 허건의 그림을 처음 품에 안았다. 결론적으로는 첫 컬렉션부터 탁월했다. 한국화를 대표하는 청전과 남농은 그 시절에도 인기였고 지금도 사랑받는다. 그때부터 작품을 모으기 시작해 2014년 뮤지엄 개관 때까지 3,700점 이상을 수집했다. 따져보면 평균 사나흘에 1점꼴로 산 셈이다. 매년 작품 구입비로 20억~30억원을 썼고 천안 목천읍에 있는 3,000평 규모의 수장고 유지에 연간 5억원이 든다. 작품 보는 눈은 남들보다 빨랐고 결정과 구입은 과감했다. 2002년 60만달러(약 7억원)에 산 독일미술가 지그마어 폴케(1941~2010)의 대작 ‘서부에서 가장 빠른 총’은 작가 사망 이후 1,000만달러 이상에 거래된다. 2003년 당시 국내에서는 무명에 가깝던 ‘신 라이프치히 학파’의 대표작가 네오 라우흐의 작품을 23만유로(약 34만달러)에 구입했고 이 작가의 작품은 현재 200만달러를 줘도 못 구하는 지경이다.

그렇게 김 회장의 ‘꿈을 실은 자전거’는 사업과 예술의 두 바퀴로 달려왔다. 쇠락해가는 천안에서 KTX가 개통하면 퇴물이 될 게 뻔한 터미널사업이었다. 그는 천안 신부동 터미널 부근을 백화점과 극장 등이 입점한 멀티플렉스로 조성하고 아라리오갤러리의 야외 조각전시장을 통해 풍요로움을 더했다. ‘아라리오 스몰 시티’로 통하는 600m의 거리에는 데이미언 허스트, 수보드 굽타, 키스 해링, 고헤이 나와 등의 대형 작품이 빼곡해 도시의 경쟁력이 됐다.

“사생결단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내가 그다음 단계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미술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술을 통해 사업의 방향성을 잡았죠. 지방에서는 건설업이 제일 수월하고 미술로 돈 벌라며 경매회사 투자 제의도 받았지만 어느 것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돈과 사업에 향기가 있어야 고객들이 다가와 꿀을 만들어준다고 생각합니다. 진심과 열정으로 만든 조각공원과 뮤지엄을 비롯해 저의 모든 사업에는 예술이 포함돼 있습니다.”

아무리 ‘감(感)’이 좋았다고 하지만 세계 100대, 200대 컬렉터로 선정될 정도인 그의 안목과 미술투자 수익률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성격 탓인지 남들 하라는 것은 잘 안 합니다. 적자를 흑자로 만든 매점 직영도 남들이 안 하던 것이었죠. 그림도 남이 ‘이거 사라 저거 사라’ 권하는 걸 따른 적 없습니다. 내 느낌이 통했을 때만 샀어요. 그림 하나를 사면 그것을 계속 생각하고 연구하고 책을 보는 식으로 생각을 확장시킵니다. 천안과 비슷한 독일의 라이프치히는 인구가 80만명도 안 되는데도 회화의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서정적인 라우흐, 토비아스 레베르거 같은 좋은 작가들이 많아서 집중적으로 컬렉션 했죠. 2000년대가 되면서는 세기말적 감수성을 과감한 실험정신으로 보여준 브리티시 컬렉션(yBa로 대표되는 영국 젊은작가군)을 또 집중해서 수집했죠. 근대미술만 해도 중요한 것은 입체파니 미니멀리즘이니 식으로 구분하는 ‘스타일’과 ‘화풍’이었지만 현대로 넘어오면서는 작가의 사상과 철학이 담기는 게 가장 중요해졌습니다. 작가의 이념이 결여된 단편적인 회화는 의미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상을 풀어낸 작품, 그것이 현대미술을 선택하는 나의 주관입니다.”

김 회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근대건축가 김수근의 서울 원서동 ‘공간’ 사옥이 2013년 부도로 경매에 부쳐졌다 유찰되자 이튿날 곧바로 150억원에 매입을 결정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제주도까지 총 5개관의 뮤지엄이 개관했다. 이미 아라리오갤러리로 천안에서 서울로, 이어 뉴욕·베이징을 거쳐 상하이까지 진출한 김 회장의 숙원은 자신의 컬렉션을 색깔 있게 보여줄 미술관을 세우는 것이었고 그 꿈을 이뤘다. 통상 미술관은 ‘돈 먹는 하마’다. 수익성이 저조해 기업문화재단의 지원을 받는 미술관도 재정적 여유가 어렵다. 김 회장은 접근은 달랐다. 제주에서는 버려진 극장·모텔 등을 리노베이션 해 세련된 미술관으로 꾸미고 주변에 레스토랑과 베이커리 등을 포진해 잊힌 구도심을 살려냈다.

“나에게는 식당을 꾸미는 게 설치미술이고 운영은 퍼포먼스입니다. 난 이미 뉴욕과 저우창에 갤러리를 열어봤고 좌절도 해봤습니다. 생존도 생각해야 하는 난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니까, 실패를 또 겪을 수는 없죠. 빨리 결정하고 추진할 따름이지 15년 이상의 장기 계획을 두고 있습니다. 예술이 있는 곳에는 즐길 수 있는 것도 있어야죠. 영혼과 생명이 모두 양식을 얻고 가면 좋지 않습니까. 미술관과 갤러리는 아직도 적자지만 저는 꿈을 향해, 힘들어도 산을 오르는 마음으로 즐기며 나아갑니다. 다만 방향을 잃지 말아야죠.”

30년 이상의 꿈인 뮤지엄 개관을 이뤘지만 김 회장은 “꿈은 이제 시작”이라고 했다. 기존 건물을 개조한 것이 아닌 이상적인 자신의 미술관을 신축해 모든 컬렉션을 다 보여주고 공감하고 싶은 것이 그의 다음 꿈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사진=권욱기자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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