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개원 당시 벤치마킹했던 귀 전문병원인 미국 하우스이어클리닉(House Ear Clinic)과 코 전문병원인 일본 가미오병원을 능가하는 세계 최고의 이비인후과 전문병원을 꼭 만들어낼 것입니다.”
국내 최초의 이비인후과 전문병원인 하나이비인후과 병원을 이끌고 있는 정도광(53·사진) 원장이 이같이 원대한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진료의 기본원칙을 지키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기 때문이다. 정 원장은 우선 ‘30분 대기 3분 진료’라는 의료계의 현실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정 원장은 “대학병원 재직시절 아파서 병원을 찾은 많은 환자들이 병원 로비에서 대기했던 시간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진료시간에 적잖게 당황하며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수없이 봤다”며 “진료실에 들어서 의사 앞에 앉자마자 금세 몸을 일으켜 세워 나가야 하는 환자를 보며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의료현실은 정 원장이 안정된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개원가에 뛰어드는 계기가 됐다.
그는 불안한 환자의 마음을 읽고 충분한 설명을 곁들여 안심시키는 것도 흰 가운을 입은 의사의 소임이라고 여긴다.
실제 그는 ‘30분 대기 3분 진료’라는 말이 무색하게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질환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는 의사로 정평이 나 있다. 인심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상으로 환자에게 격의 없이 다가서는 정 원장의 푸근함은 특히 뭇 소아·노인 환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축농증 수술 등 코 관련 질환 치료의 권위자로 통하는 그의 빼어난 의술도 그에게 환자가 믿고 몸을 맡기는 이유다.
이비인후과계에서 유명했던 박재훈 원장과 이상덕 원장이 의기투합해 만든 하나이비인후과에 정원장은 개원 3년 뒤인 1998년에 합류하게 됐다
지난 1995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개원한 하나이비인후과는 이비인후과 전문병원 중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현재 12명의 의사가 진료를 맡고 있다.
30여년간 의사의 길을 걸어온 그는 처음부터 의학도의 길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수학을 좋아하고 잘했던 청년 정도광은 기초과학 혹은 컴퓨터공학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3학년 어느 가을날 변곡점을 맞게 된다.
“아버지가 주무시다 갑자기 경련을 일으켜 의식을 거의 잃은 일이 있었어요. 당시 어머니도 우울증을 앓아 병원에 입원 중이라 아버지 혼자 집에 계실 때였죠. 조금만 늦었어도 유명을 달리하셨을 텐데 천만다행으로 발견해 급히 응급실로 옮겼습니다. 기생충이 뇌에 들어가 빚어진 경련이라고 하더군요.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연이어 병원 신세를 지면서 고3 끝자락은 그야말로 힘겹게 보냈지요.”
하지만 ‘전화위복’이랄까. 이 일 덕분에 그는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보다 명확한 꿈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고려대 의대에 입학한 정 원장은 본과 1학년 때 동기 6명, 선배 3명 등과 합을 맞춰 의대 최초로 ‘신경과학연구회’라는 동아리를 만들기도 했다. 이곳에서 후에 하나이비인후과를 공동 운영할 이상덕 원장을 만나게 된다. 당시만 해도 훗날 함께 병원을 운영할지 몰랐던 두 사람은 이비인후과 전문의 취득 후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다가 1997년 이 원장이 ‘절친’인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 원장은 1995년 개원 후 지속적으로 매출이 늘어나게 되면서 이비인후과전문병원이라는 비전을 함께 실현할 인물로 정 원장을 택했다.
당시 의대 교수로 안정적인 의사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던 정 원장에게 개원가 행은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러나 “첨단시설을 갖춘 대학병원 못지않은 환자를 위한 최고 병원을 만들어보자”는 이 원장의 끈질긴 설득으로 결국 병원에 합류하게 됐다.
그는 “당시 국내 이비인후과로는 공동 개원이 첫 사례라 주변의 회의적인 반응도 많았다”며 “각종 최첨단 장비를 들여와 국내 최초의 시도를 이어가고 있지만 소위 환자를 모으고 수익을 내며 병원을 제대로 꾸려나갈 수 있겠냐는 우려가 컸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변의 이 같은 우려는 이내 사그라졌다. 개원 당시 2개 층으로 시작했던 병원이 지하 2층, 지상 7층 규모로 커졌고 병원은 운영 3년 만에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물론 의대 교수로서의 명예, 안정적 행보를 일찍이 접고 개인병원 운영에 나서면서 굴곡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병원 개원 직후 불거졌던 IMF 경제위기도 병원 운영에 어려움을 줬다. 그럼에도 20여 년간 굳건히 병원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이비인후과를 믿고 찾는 환자들 때문이었다.
50대 후반에 만난 한 남성 환자는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 정 원장과 연을 맺고 있다. 이 환자는 정 원장을 주저 없이 ‘생명의 은인’으로 꼽는다. 자주 코가 막히는 등 비염 증상을 호소하며 병원을 찾은 이 환자는 비인강(코 뒤쪽 목으로 이어지는 경계)에 암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일찍이 손을 써 새 삶을 살게 됐기 때문이다. 비인강 암은 대개 목에 혹이 생겨 손으로 만져질 때쯤 뒤늦게 알아차린다. 혹이 만져진다는 것은 이미 다른 곳으로 암 덩어리가 전이됐다는 말로 이때가 되면 안타깝게도 4∼5년 뒤 사망에 이른다. 소리소문없이 몸속에 자리한 이 암을 정 원장은 환자의 이상적 징후로 일찍이 발견해냈다.
“내원 당시 이 환자의 콧속에 딱지 등 이물질이 참 많았어요. 비염이면 부어 있는 정도로 그쳐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단순 질환은 아닌 것 같았지요. 엑스레이를 우선 찍었는데 눈에 띄는 것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미심쩍어 내시경으로 코안을 샅샅이 훑었죠. ‘비인강’에 자리한 암 덩어리가 그제야 보이더군요. 암 전문치료는 이곳에서 할 수 없었던 만큼 소견서를 꼼꼼히 써 이 환자를 삼성서울병원으로 인계했습니다. 이후 그곳에서 수술을 받고 건강한 삶을 살고 계십니다.”
그는 “환자로부터 ‘새 생명을 준 이곳만큼 믿고 내 몸을 맡길 수 있는 곳이 어디 있느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의사로서 더할 나위 없는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하나이비인후과에는 이처럼 오랜 시간 정 원장과 연을 맺어온 이들이 많다. 서슴없이 환자와 경계를 허물고 꼼꼼히 질환을 살피는 그의 섬세함이 환자의 마음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의사의 사명은 환자를 돋보기로 보듯 자세히 살피는 것”이라며 “흔치 않은 드문 증상을 마주할 때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자질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원장을 비롯한 하나이비인후과 의료진에게는 꼭 이루고 싶은 원대한 꿈이 있다. 건물 외벽과 진료실 로비에 자리한 이색 문구가 이를 대신 말해주고 있다. ‘풍부한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환자를 섬기는 세계적 이비인후과 전문병원’.
당찬 포부지만 이 꿈의 실현이 그리 멀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국내 최초 코골이 수술, 국내 최초 축농증 내시경 수술 등 각종 ‘최초’ 기록을 토해내고 있음은 물론 20여년을 이어오면서 보유한 다양한 환자 사례는 병원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하나이비인후과는 이미 2014년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의료 해외진출 지원사업 대상 병원으로 선정돼 몽골 최대의 이비인후과병원에 하나이비인후과 의료 시스템을 수출하기도 했다. 또 ‘내비게이션 수술’ ‘풍선 카테터 부비동 확장술(풍선을 이용한 축농증 치료법)’ 등의 우수 수술법 참관을 위해 대만 대학 교수 및 이비인후과 전문의가 찾는 등 세계 각국의 병원들이 벤치마킹하는 ‘세계적 전문병원’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정 원장은 “정직과 원칙, 환자 중심의 진료, 최상의 의료 서비스 제공이라는 가치를 진료현장에서 구현해 반드시 세계적 이비인후과 전문병원으로 자리매김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사진=이호재기자
He is...
△1963년 서울
△1982년 휘문고등학교 졸업
△1988년 고려대 의대 졸업
△1996년 이비인후과 전문의 취득
△1996∼1997년 고려대 안산병원 이비인후과 과장
△2002년 중앙대 의대 의학박사 취득
△1997년~ 하나이비인후과병원 재직
△2014년∼ 대한이비인후과 개원의사회 서울지회장
△2015년∼ 대한비과학회 부회장, 고려대·중앙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하나이비인후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