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경제 흔드는 정치 더이상 안된다] 국감때면 기업인 호출 '군기잡기'...CEO 공백에 경영차질 일쑤

<2> '기업인에 갑질' 국회 관행 이번에는 끊자"

현안은 뒷전 호통·면박에 엉뚱한 민원까지 꺼내

"외국선 CEO 의회 출석땐 대형 스캔들 연루 생각

보이지 않는 디스카운트로 수주·영업에 악영향"

상시청문회 도입하려면 국감폐지 등 제도 정비를







간


“한국과 일본이 축구 시합을 하면 한국을 응원합니까.”

국회 정무위원회는 지난해 9월 국정감사에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불러 세웠다. 대기업 총수가 국감장에 나선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명분은 있었다. 롯데그룹의 불투명한 지배구조를 따지고 개선을 요구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웠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박대동 새누리당 의원은 느닷없이 축구 ‘한일전’ 이야기를 꺼내 실소를 불러일으켰다. 신학용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인 인천 계양산에 롯데가 골프장을 건설하면서 통행을 금지해 주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고 엉뚱한 지역구 민원을 꺼내 들었다.

재계는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한 국회의원들의 ‘갑질’ 관행이 이번 20대 국회에서는 반드시 단절돼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매년 국정감사 때마다 국회 정무위 등을 중심으로 그룹 총수와 주요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을 불러내 호통치는 관행이 대물림되면서 정상적인 경영활동까지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위원회 등을 맡아 재벌개혁 등의 이슈를 다루는 정무위는 지난해 9월 국정감사에서 신동빈 회장과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 조대식 SK 사장 등을 증인으로 출석시켰다.

이에 앞서 지난 2013년 국감 때는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이혜경 당시 동양 부회장과 현대자동차·BMW코리아·아모레퍼시픽 등의 경영인들이 줄줄이 국회로 불려나갔다. 이들 경영진 중에는 당시 하루 종일 국회에 대기하면서도 현안과 관련해 결국 입 한 번 떼어보지 못하고 씁쓸히 발걸음을 돌린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지난해 9월 국회에서 열린 국정감사에 출석한 신동빈(가운데) 롯데그룹 회장이 물을 마시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경영 환경이 급변하고 있는 가운데 국회가 기업의 발목을 잡는  군기잡기 관행이 20대 국회에서는 뿌리 뽑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연합뉴스지난해 9월 국회에서 열린 국정감사에 출석한 신동빈(가운데) 롯데그룹 회장이 물을 마시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경영 환경이 급변하고 있는 가운데 국회가 기업의 발목을 잡는 군기잡기 관행이 20대 국회에서는 뿌리 뽑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연합뉴스


10대 그룹 대관팀의 한 관계자는 “의원이 총수나 CEO를 부르겠다고 나서면 기업들은 바짝 엎드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의원들과 보좌진이 더 잘 알고 있다”며 “이런 상태에서 국감에 나선들 생산적인 토론이 이뤄질 리 만무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앞서 야권이 재의결을 공언한 ‘상시청문회법’에 대한 우려는 더욱 크다. 1년에 한 번 치르는 국감만으로도 경영에 비상이 걸릴 정도인데 연중 무시로 청문회를 치를 경우 청문회 때문에 경영이 뒷전으로 밀리는 ‘주객전도’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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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경영진의 공백 리스크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 CEO들은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2시간 동안 회의를 주재하고 고객사들을 만난 뒤 호텔에 짐도 풀지 못하고 다시 비행기에 오르는 ‘무박(無泊)’ 강행군 출장이 일상화돼 있다. 글로벌 시장 여건이 급변하는 가운데 1분 1초를 쪼개 쓸 정도로 숨 가쁜 경영활동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청문회 대상 기업이 되면 이런 일정은 올스톱된다. 의원들이 언제 변덕을 부려 소환 일정을 바꿀지 알 수 없는데다 만약 외부 일정을 이유로 청문회 출석을 거부할 경우 ‘괘씸죄’에 걸려 더 큰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탓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외국에서는 CEO가 의회에 출석한다고 하면 대형 스캔들에 연루된 것으로 생각한다”며 “눈에 보이지 않는 디스카운트로 수주나 영업에 차질이 생기면 기업은 물론 국가 경제 입장에서도 손해”라고 설명했다.

국회의 ‘군기 잡기’ 때문에 경영계획이 차질을 빚는 사례도 발생할 수 있다.

예컨대 2013년 10월 국회 정무위는 국감장에 백남육 당시 삼성전자 사장을 참고인으로 불러 “사상 최대 이익이 났는데 협력업체는 총 몇 개인가” “전기세를 깎아주는데 설비투자가 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등 국감의 주제와 동떨어진 내용들을 연이어 따져 물었다. 투자와 고용은 기업의 경영판단에 따라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영역인데도 의원들이 선을 넘으려 하는 듯한 모습이 연출된 것이다. 기업이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경영진을 불러 호통치는 것을 넘어 경영에까지 간섭하려 들면 정상적인 기업활동까지 어려워진다는 게 기업인들의 하소연이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이번 기회에 국감과 청문회 등의 제도들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재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국감 자체가 군사독재를 겪은 한국만이 갖고 있는 전 세계 유일무이한 제도”라며 “만약 상시청문회를 도입하려거든 국감부터 없애는 게 순리”라고 지적했다. 법조계에서도 문을 닫는 국회가 새로 문을 여는 국회의 규칙을 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있다.

서일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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