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캐나다를 만든' 페니언 침공 사건



1866년 6월1일 0시10분. 미군 군복 차림의 ‘페니언 형제단(Fenian Brotherhood)’이 나이아가라강을 건너 캐나다 땅을 밟았다. 페니언이란 영국의 식민통치에 대항하기 위해 1848년 아일랜드에서 시작된 비밀결사. 감자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인들은 준군사조직인 ‘페니언 형제단’을 결성하고 대영 투쟁에 나설 시기만 손꼽아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미국 정부는 민병대 수준 이상으로 군대를 키우는 페니언 형제단을 묵인했다. 남북전쟁에서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남부에 기울었던 영국에 대한 감정적 앙금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잘만 풀리면 드넓은 캐나다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침략자이자 동포를 굶어 죽게 만든 영국인들을 캐나다에서 몰아내겠다’는 페니언 형제단을 미국은 알게 모르게 도왔다.


페니언 형제단의 목표는 캐나다 영토보다는 아일랜드 독립운동 지원. 아일랜드에 주둔하는 영국 군대를 캐나다로 끌어들여 조국의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겠다는 페니언 형제단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집결하는 내내 이들은 군가와 아일랜드 민요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테네시와 켄터키·오하이오 주 등 3개 주에서 모여든 자원병은 약 3,000명. 한달 전 소규모 침공에 실패했던 터라 대규모 병력을 모았다.

나이아가라강 도강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작전 시작 14시간 만에 페니언 형제단 1,200명이 캐나다에 들어와 진을 쳤다. 바로 다음날 릿지웨이에서 페니언 형제단 700여명은 캐나다군 850명과 싸워 크게 이겼다. 당연했다. 페니언 형제단은 말이 준군사조직이지 남북전쟁(1861~1865)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전쟁 직후 남아도는 무기도 지천이어서 장비도 미국 정규군에 버금갔다.

페니언들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바로 이어진 이리항 전투에서 소수의 캐나다 민병대에 저지되고 영국 정규군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방조하던 미국은 캐나다 민병대의 저항이 예상보다 거세고 영국군이 강력한 증원군을 보낸다는 소식에 페니언 형제단의 추가 도강을 막았다. 무장까지 해제시키자 페니언들은 소득 없이 돌아왔다. 한달 뒤 프랑스계 지역에 대한 공격의 결과도 마찬가지. 기대와 달리 프랑스계와 아일랜드계 캐나다인들의 내응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페니언의 캐나다 침공은 무위로 끝났지만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첫째는 100년이 넘는 저항. 페니언들이 처음 사용한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이름 아래 아일랜드 애국자들은 피나는 독립투쟁을 벌였다. 두 번째는 캐나다의 통합과 연방의 성립. 캐나다 전역에 미국 침공 위기감이 일고 없었던 민족 감정이 생겨났다. 동부와 서부, 북부와 남부로 분열됐던 각 주는 연합 통합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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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했던 미국의 알래스카 합병까지 현실로 다가온 상황. 위 아래로 강력한 미국에 끼인 캐나다는 1867년 3월 자치연방으로 합쳐졌다. 비록 패한 전투지만 영국군의 도움 없이 캐나다인 민병대와 캐나다인 장교로만 치른 최초의 전투인 릿지웨이 전투는 ‘캐나다 연방을 탄생시킨 전투’로 기억된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미국과 캐나다는 처음부터 사이좋은 이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오랫동안 두 나라는 가상적국이었다. 페니언 침공 사건 이전에도 세 차례의 크고 작은 싸움이 있었다. 독립전쟁 시절부터 미국인들은 캐나다를 영국과 떼어놓으려고 애썼다. 독립선언 직전인 1775년 대륙회의는 퀘벡주에 영국과 함께 싸우자는 러브레터를 보냈다. 프랑스계여서 호응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퀘벡주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대륙군 1,200명은 1775년 12월 퀘벡주로 쳐들어갔다. 몬트리올을 점령하는 등 서전에서 기세를 올렸던 대륙군은 퀘벡전투에서 처참한 패배를 맛보고 캐나다를 끌어들이려던 계획을 접었다. 두 번째 싸움은 영란전쟁(1812~1814). 지지부진한 전황이 이어지면서 캐나다를 점령하자던 미국 강경파들의 계획도 흐지부지 끝났다.

보다 복잡하고 길게 이어졌던 세 번째 다툼은 중서부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1818년 양국의 합의에 따라 ‘오리건 지역’(오늘날 오리건주가 아니라 당시에는 중서부 일대를 통칭했다)을 공동의 영토로 인정했으나 미국의 서부 개척민이 급증하면서 영유권 시비가 불거졌다. 양국에서 전쟁 불사론이 퍼지는 가운데 11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제임스 녹스가 선거공약인 오리건 전역의 영토화를 밀고 나갔다. 전운은 영국이 먼저 양보하며 사라졌다. 아일랜드 대기근과 곡물법 폐지 논란, 정계개편 등에 골머리를 앓던 로버트 필 총리가 내놓은 타협안이 북위 49도 국경선. 미국도 남부와 북부의 대립 심화와 텍사스 병합을 둘러싸고 멕시코와 갈등을 빚던 처지여서 그대로 받아들였다. 일부 불분명한 점이 남아 있었지만 양국은 만족하며 1846년 오리건 협정을 맺었다.

불씨가 살아난 것은 오리건 협정 체결 만 13년이 지난 1859년 6월15일. 국경의 서쪽 끝인 미국 시애틀과 영국의 캐나다 식민지 밴쿠버 사이의 존 후안 제도에서 일이 터졌다. 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며 뒤섞여 살던 중 미국인 농부가 자신의 감자밭을 파헤치는 캐나다 농장 소유의 돼지 한 마리를 총으로 쏴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자 양국은 군대를 보냈다. 조그만 섬에서 3,000여명의 양국 병력이 12년간 대치한 ‘돼지전쟁’은 독일황제 카이저 빌헬름의 중재에 따라 분쟁 지역인 존 후안 제도의 미국령 귀속으로 끝났다. 실질적인 전투는 없었기에 유일한 생명 손실은 돼지 한 마리. 세계 최장의 국경선(8,893㎞. 지구 둘레의 5분의1보다도 길다)이 가장 낮은 비용으로 확정된 셈이다.

네 번째 싸움에 해당되는 페니언 침공 사건이 양국의 암묵적 동의 아래 진정된 뒤에도 갈등은 그치지 않았다. 대서양 뉴펀들랜드의 영유권과 어업권을 놓고도 20세기 중반까지 다퉜다. 겉으로는 상대를 인정하면서도 속으로는 무서운 칼날을 갈았다. 제1차세계대전 직후 캐나다는 미국과 전면전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해 ‘제 1호 방위계획(Defence Scheme No. 1)’이라는 비밀작전을 짰다.(‘제2호 방위계획’은 미국, 일본과 공동으로 전쟁을 치를 경우 영국과 공등대응하는 작전이었다.) 미국도 마찬가지. 식민지를 포함한 대영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는 비밀작전계획 ‘적색 전쟁계획(War Plan Red)’에서 캐나다는 ‘크림슨(Crimson·진한 빨강)’으로 1순위 처치 대상이었다(영국 본토는 Red로 공격 2순위, 인도는 루비색으로 2순위, 호주는 자주색으로 3순위, 나머지 영국 식민지는 핑크, 유사시 영국에 반기를 들 가능성이 높은 아일랜드는 에머럴드색으로 분류했다. 제2차세계대전이 터지며 양국의 비밀계획은 실행되지 않았지만 미국은 적색전쟁계획을 1974년까지 비밀로 분류했다. 국제 관계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는 법이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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