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욕먹을라면

[식담객 신씨의 밥상] 열번째 이야기-라면



“신, 내일은 옷 편하게 입고 와. 배달 간다.”

2004년 1월, 전국적으로 조류 독감이 창궐해 닭고기 파동이 일던 무렵이었습니다.


갓 서른에 접어든 나는 과장님과 함께 명절 선물 배달에 나섰습니다.

우리 부서는 전년 추석에 V.I.P. 고객용으로 고급 쇠고기를 택배로 보냈었습니다.

그런데 배송 중 몇 개 세트에서 핏물이 새는 바람에, 다음 설엔 직원들이 직접 배송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배송 전날, 과장님은 지도책을 폈습니다. 차량용 네비게이터(navigator)가 아직 대중화되기 전이라, 지도책만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길잡이였습니다.

송파, 강남, 서초 같은 서울 지역과 분당, 일산, 과천까지 50여곳을 가는 이틀 동안의 여정이 잡혔습니다. 금요일 아침, 성동구 마장동의 고기 거래처로 가서 정육선물세트 30여 개를 싣습니다.

과장님의 금색 리오는 이내 뒷자리까지 고기 상자로 가득 찹니다.

명절 전 선물 대목 시즌이라 시내 정체가 만만치 않습니다. 마음은 급한데, 전화를 받지 않는 곳도 많습니다.

어렵사리 통화가 되면 경비실에 맡기라는 말이 대부분입니다. 아파트 경비원들께서는 청바지에 점퍼 차림인 내 행색에 대개 피곤해하십니다.

“아, 여기 경비실에 선물 쌓인 것 봐봐. 그거 고기라고 했지? 괜히 뒀다가 상하면 우리만 욕먹으니까 안 맡아요.”

정장을 입었을 땐 이런 대접을 받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올까 하는 충동이 살짝 입니다.

택배 아저씨들 고생하신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삼성동 고급 주택가 어느 2층 저택의 벨을 누릅니다.

영화에서나 나올 듯한 아름다운 30대 중반 여성이 대문을 열고 맞이합니다.

고기 상자를 들고 불 꺼진 화랑 같은 1층을 지나 2층에 이르니, 볕이 아주 잘 듭니다.

커다란 거실창 너머 보이는 정원수들이 벽에 걸린 그림과 비슷합니다.

차 한 잔 마시고 가라는 부인의 말에 괜스레 얼굴이 붉어집니다.

이내 차에서 기다리는 과장님이 떠올라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청담역 인근 어느 아파트에 가니, 조선족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문을 여십니다.

“이거 금방 상하는 고급제품이니까 잘 보관해 주셔야 합니다.”

“난 잘 모르니 들어와서 놓고 가요.”

20평은 족히 넘어 보이는 거실이 각종 선물로 가득합니다.

‘빈익빈’만 겪었던 서민 청년은 부익부를 목격하고 피식 웃습니다.

강남을 넘어 서초에 이르자,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합니다.

아파트 단지에 드나드는데, 의자왕(체어맨)이나 말(에쿠스) 같은 큰 차들이 양보할 상황에 오히려 머리를 들이밉니다.

차가 준중형이라 그런 무시당하는 기분이 듭니다.

“가라 가, 이 인간아!”

선비 같은 과장님은 노여워할 상황에서도 짜증을 점잖게 내십니다.

마음이 무거워 밥 먹자는 얘기도 못 꺼냅니다.

“일단 먼저 돌리고 저녁은 나중에 먹자.”

이런 저런 마을 이름이 많은 일산에서 일을 마치니 지하철 막차 시간입니다.

밥을 못 먹어서 그런지 현기증이 납니다.

춥고 배고픈 모습이 딱 거지꼴입니다.

이튿날 토요일 아침, 마장동에서 다시 고기를 싣습니다.

오전 내내 분당과 용인 배송을 마치고, 김치 두루치기로 점심을 먹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목적지인 안성으로 향합니다. 딱 한 곳 돌리겠다고 안성 깊숙한 곳까지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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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시골 마을엔, 아침부터 내린 눈이 발목까지 쌓였습니다.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다리가 아주 좁습니다.

차가 겨우 통과할 듯한 너비에 난간도 없어, 아주 위험해 보입니다.

센스 있는 후배라면 이런 때 기지를 발휘해 점수를 따야 합니다.

“제가 여기서 내려서 차를 봐 드리겠습니다.”

나의 지혜로운 판단과 대응에, 과장님이 감탄해 하실 모습을 떠올리니 괜히 웃음이 납니다.

“똑바로 안 앉아 있어?”

화답하는 건 과장님의 분노한 목소리입니다.

뜻밖의 반응에 당황스럽습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지?

얌생이들에게도 너그러운 분인데...

“X끼가 지 혼자 살겠다고 잔머리야!”

아... 그런 게 아닌데, 이 억울한 상황을 어떻게 말해야 합니다.

“과장님, 그게 아니라 위험해 보여서요.”

“됐어, 조용히 가.”

간결한 대답에 입을 꾹 다뭅니다.

말해봤자 이미 부질없는 상황입니다.

풀이 죽어 조용히 가고 있는데, 인가 너머로 공장 안내 표지판이 보입니다.

농심 안성공장입니다. 갑자기 안성탕면이 땡깁니다.

십원짜리 동전도 씹어 삼킬 청춘입니다.

하지만 점심도 먹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라면을 먹고 가자면 한 소리 들을 것 같습니다.

슬기로운 후배는 여기서 자연스럽게 스토리텔링을 합니다.

“과장님, 농심공장이 여기 있었네요. 안성에 공장이 있어 안성탕면인 건가요?”

“글쎄다.”

과장님 목소리가 누그러진 듯해, 바로 말을 잇습니다.

“라면 얘기하니까 시장하지 않으세요, 라면이나 한 그릇 들고 가시죠?”

과장님은 흘깃 쳐다보고 뭐라고 말을 꺼내시려다가, 담담하게 앞만 보고 운전에 집중하십니다.

몇 달 전 아주 분노했을 때 저런 표정을 지으신 적이 있습니다.

차 안에 다시 정적이 흐릅니다.

이번엔 좀전보다 훨씬 깁니다.

욕 먹기 딱 좋은 날이구나.

안성은 내게 욕 퍼먹기 안성맞춤인 고장인가 봅니다.

눈발이 다시 굵어지기 시작합니다.

서울까지 어떻게 가지?

/식담객 analogoldman@naver.com



식담객 신씨는?

학창시절 개그맨과 작가를 준비하다가 우연치 않게 언론 홍보에 입문, 발칙한 상상과 대담한 도전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어원 풀이와 스토리텔링을 통한 기업 알리기에 능통한 15년차 기업홍보 전문가. 한겨레신문에서 직장인 컬럼을 연재했고, 한국경제 ‘金과장 李대리’의 기획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PR 전문 매거진 ‘The PR’에서 홍보카툰 ‘ 미스터 홍키호테’의 스토리를 집필 중이며, PR 관련 강연과 기고도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홍보 바닥에서 매운 맛을 본 이들의 이야기 ‘홍보의 辛(초록물고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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