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스크린 도어를 뒤로하고 어머니에게 달려가렴'...구의역 사건 빗댄 시 '뭉클'

심보선 시인, 시 ‘갈색 가방이 있던 역’ 써붙여

시인 심보선이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 중 사고로 숨진 김모(19)씨를 기리며 역에 써 붙인 시(詩)가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시인은 지난 8일 ‘갈색 가방이 있던 역’이라는 제목의 시를 종이에 자필로 써 구의역 승강장 스크린도어에 붙였다.


이 시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시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 형식을 모방해 쓴 것이다. 시인은 심보르스카의 시와 자신의 시를 나란히 써붙였다.

‘갈색 가방이 있던 역’은 “작업에 몰두하던 소년은/스크린도어 위의 시를 읽을 시간도/달려오는 열차를 피할 시간도 없었네.”로 시작한다.

“갈색 가방 속의 컵라면과/나무젓가락과 스텐수저/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아니, 고작 그게 전부야?“//읽다 만 소설책, 쓰다 만 편지/접다 만 종이학, 싸다 만 선물은 없었네./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여기서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라는 구절은 국민의당 안철수 상임공동대표가 이 사고와 관련해 자신의 트위터에 올렸다가 논란을 일으킨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 지도 모른다“는 글을 비꼰 것이다.

시인은 사고의 원인을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려 한 철도 관계자들을 질타하기도 했다.

”전지전능의 황금열쇠여,/어느 제복의 주머니에 숨어 있건 당장 모습을 나타내렴./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이것 봐. 멀쩡하잖아, 결국 자기 잘못이라니까.”

시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난다.

“자, 스크린도어를 뒤로하고 어서 달려가렴./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에게로 쌩쌩 달려가렴./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 하고 외쳐주세요!/우리가 지옥문을 깨부수고 소년을 와락 끌어안을 수 있도록.”

이 시는 구의역을 다녀간 누리꾼들이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리면서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다. 이 사진과 시가 게재된 페이스북에는 수백 건의 ‘좋아요’와 공감 댓글이 달렸다.

심보선 시인은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풍경’이 당선되면서 등단해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눈앞에 없는 사랑’ 등을 냈다. 사회학을 전공한 그는 시를 쓰면서 사회학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갈색 가방이 있던 역

-심 보 선

작업에 몰두하던 소년은

스크린도어 위의 시를 읽을 시간도

달려오는 열차를 피할 시간도 없었네.

갈색 가방 속의 컵라면과

나무젓가락과 스텐수저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니, 고작 그게 전부야?”

읽다 만 소설책, 쓰다 만 편지


접다 만 종이학, 싸다 만 선물은 없었네.

관련기사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전지전능의 황금열쇠여,

어느 제복의 주머니에 숨어 있건 당장 모습을 나타내렴.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이것 봐. 멀쩡하잖아, 결국 자기 잘못이라니까.”

갈가리 찢긴 소년의 졸업장과 계약서가

도시의 온 건물을 화산재처럼 뒤덮네.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무렴. 직업엔 귀천이 없지, 없고 말고.”

소년이여, 비좁고 차가운 암흑에서 얼른 빠져나오렴.

너의 손은 문이 닫히기도 전에 홀로 적막했으니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난 그를 향해 최대한 손을 뻗었다고.”

허튼 약속이 빼앗아 달아났던

너의 미래를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마, 여기엔 이제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웃는 소년은 없다네.”

자, 스크린도어를 뒤로하고 어서 달려가렴.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에게로 쌩쌩 달려가렴.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 하고 외쳐주세요!

우리가 지옥문을 깨부수고 소년을 와락 끌어안을 수 있도록

임세원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