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 그는 오후 1시부터 이베이에듀에서 진행하는 ‘농아인 대상 창업스쿨’ 세미나를 진행했다. 동시 수화통역사와 함께 3시간 가량 진행된 강연에서 그는 창업을 결심하게 된 계기와 창업 과정에서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2005년 그는 회사 사정으로 다니던 회사에서 나오게 됐다. 모았던 돈으로 중국을 여행하던 중, 인터넷을 통해 ‘나의 왼발’이란 장애인 창업 지원 교육 프로그램(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과 옥션 공동 운영)을 알게 됐다.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던 때 이 프로그램은 그에게 ‘기회’로 보였다. 그는 “그때가 1기였는데 프로그램 내용을 보는 순간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내 인생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고 떨어지는 별똥별을 잡듯이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고 말했다. “3주 동안 숙박을 하면서 만났던 사장님들이 저를 아낌없이 사랑해주셨어요. 프로젝트가 끝나고 찍은 사진을 힘들 때마다 꺼내 볼 정도로 저에겐 정말 소중한 추억입니다.”
이후 2005년부터 사업을 시작한 그. 나도 할 수 있다는 도전의식은 강했지만 사회의 시선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농아인이 창업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냥 공장에서 일하는 게 최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성격상 그런 얘기를 들으면 내가 한번 보여주겠다는 고집이 생깁니다. 비장애인도 창업을 한다고 하면 말릴 거라며 농아인은 더더욱 안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스스로에게 강하게 말했습니다.” ‘절대 흔들리지 말자’
한국에 전문적인 수화 통역사가 많지 않았던 점도 어려운 요인이 됐다. 그는 “동사무소, 관공서 등에는 수화 통역사가 많지만 사업이나 비즈니스 측면에서는 수화 통역사가 많지 않아요. 아무래도 제 마음에 속 시원히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호흡을 맞추고 동행하는 파트너십이 필요합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도 사업을 진행하는 만큼 중국과 한국의 차이점도 눈에 선명히 보였다. “중국은 농아인들도 도전 정신이 뛰어납니다. 두려움이 없어요. 제가 세무서에 갔을 때 담당자가 농아인 출신 사업가는 처음이라고 했을 정도로 한국은 농아인 출신 사업자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중국엔 1,000명 이상 있습니다. 도전 정신이 바로 그 차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가 온라인에서 운영하고 있는 사업 이름은 ‘위트라이프(witlife)’. 말이나 글을 즐겁게 구사하는 능력인 ‘재치(wit)’와 ‘삶’을 뜻하는 ‘life’를 합쳐 ‘기쁨을 주는 삶’이란 뜻이다. 생활 용품부터 주방, 레져 용품까지 다양한 품목을 옥션, 지마켓 등에서 판매한다. 중국 저장성에 있는 이우(義烏)시에 해외 사무실도 있어 한 달에 4~5번 왕복하며 중국에서 물건을 받아온다.
처음 막 사업을 시작했을 땐 1인 창업자로 자택에서 시작했다. 온라인을 통해 모자, 의류 등 아이템을 판매하며 본격 창업에 돌입했다. 하지만 판로 확보도 어려웠고 소식과 트렌드에 민감해야 하는 만큼 농아인으로서 한계도 많았다. “실패는 계속됐지만 아이템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잘 팔 수 있는 아이템을 꾸준히 골라 새로운 상품을 시도했고 결국 지금처럼 자리를 잡아 이젠 경기도 하남에 65여 평의 창고까지 생겼습니다.” 이어 그는 “11년 동안 전문가처럼 여러 분야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식당에 가면 부루스타를 어디서 샀나, 무슨 브랜드인가를 유심히 보며 끊임없이 생각했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관계라고 전한다. 전화로 고객 주문이나 불평이 들어오면 문자로 직접 일일이 고객과 교류한다. 구매한 고객 한 명 한 명 마다 감사 문자 메시지와 월간 ‘좋은 생각’ 책자를 선물로 증정하는 등 사후 관리도 철저히 했다. “고광채 대표라는 이름보다 ‘행복 전도사’라는 이름으로 먼저 불리고 싶어요. 사람들한테 웃기게 하거나 기쁨을 주는 걸 좋아해서 위트라이프를 지었듯 하루 살아내기 막막한 삶을 모두가 행복하게 보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가 처음부터 긍정적이고 밝게 사고하는 습관을 가졌던 건 아니다. “학교 생활을 할 땐 바른 학생이 아니었어요. 부모님이 묵묵하게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히고 더 많은 세상을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경우 제 앞날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컴퓨터 학원을 다녔습니다. 그때부터 비장애인들과 함께 교류하는 법을 배우며 늘 해보라는 전폭적인 지지와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셨습니다”고 그만의 사연을 밝혔다. 이어 “서울 농학교에서 자랐었는데 거기서 아쉬운 점은 선생님께서 새로운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특별히 주신 적이 없었단 점입니다. 심지어 수화를 못하는 선생님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가르쳐주고 싶을 정도였어요. 그런 점에서 선생님이 학생에 대해 갖는 애정과 사랑이 정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마주치고 함께 호흡하고 사는 것은 바로 선생님입니다”고 답했다.
회사를 운영한 지도 벌써 11년. 그가 바라보는 앞으로의 미래는 어떨까. “그동안 회사의 존폐 위기도 있었고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굳건하게 회사가 성장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한국 땅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농아인들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지만 이렇게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그리고 비장애인(청인)들에게는 농아인들도 이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신들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며 밝은 미소로 대답했다.
“오늘도 막막하게 보낼 수도 있습니다. 인생은 뭐 별게 있나요? 내일이면 없을 소중한 하루 즐겁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