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라이프

궁남지·정림사지...찬란했던 백제의 숨결을 느끼다

[‘백제의 고도’ 충남 부여]

국내 최초의 인공연못 궁남지

해떠야 봉오리 여는 수련 장관

사비도성 중심사찰 정림사엔

1,400년 견딘 석탑만 그대로

새벽에는 보이지 않던 연꽃들이 해가 떠오르자 봉오리를 터뜨렸다. 밤에 잠을 자는 연꽃이라는 의미의 ‘수련(睡蓮)’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것은 아니었다.새벽에는 보이지 않던 연꽃들이 해가 떠오르자 봉오리를 터뜨렸다. 밤에 잠을 자는 연꽃이라는 의미의 ‘수련(睡蓮)’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것은 아니었다.




궁남지에는 세계 각지에서 가져온 다양한 종류의 연꽃이 식재돼 있다.궁남지에는 세계 각지에서 가져온 다양한 종류의 연꽃이 식재돼 있다.


634년 건설된 충남 부여의 궁남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다. 둥근 연못 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있고 못 가에는 버드나무가 식재돼 있다.634년 건설된 충남 부여의 궁남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다. 둥근 연못 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있고 못 가에는 버드나무가 식재돼 있다.


충남 부여로 함께 취재 간 동료가 “새벽 궁남지에 물안개가 낄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는 통에 마음에 설렜다. 지난해 가을 강원도 횡성에서 마주한 물안개의 황홀경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렘 때문인지 새벽3시도 안 돼 눈이 떠졌다. 뒤치락거리기를 한 시간…. 새벽4시가 넘어 선잠이 들었는데 친구가 알람 시간보다 15분 일찍 모닝콜을 했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 궁남지로 향했지만 기다린 물안개 대신 미세먼지가 연못을 뒤덮고 있었다. “물안개나 미세먼지나 시각적 효과가 비슷하지 않느냐”고 물어볼 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 두 가지 기상현상의 효과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물안개는 물 분자 사이로 영롱한 햇빛을 투과시키고 반사하지만 미세먼지는 햇살을 차단해 그저 우중충할 뿐이다. 그래서 궁남지에서 꺼내 든 카메라는 물안개 없는 허공 대신 물 위에 창궐한 연잎으로 향했다. 하지만 수면 위에는 연꽃 하나 없이 온통 밋밋한 초록색 잎들만 뒤덮여 있었다.




정림사지를 상징하는 구조물은 오층석탑이다. 1층 탑신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 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전문가들은 이를 근거로 정림사는 백제 왕실 또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였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정림사지를 상징하는 구조물은 오층석탑이다. 1층 탑신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 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전문가들은 이를 근거로 정림사는 백제 왕실 또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였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너희가 ‘수련(睡蓮)’의 뜻을 알아?=궁남지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백제 무왕 35년(634년) “3월에 궁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리나 먼 곳에서 물을 끌어들여 못 언덕에는 수양버들을 심고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杖仙山)을 모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바로 이 궁남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궁남지는 경주 안압지보다 40년 앞서 만들어진 못으로 둥근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이 있고 못 가에는 버드나무가, 못 안에는 갖가지 수련이 식재돼 있다.

자료에 따르면 연못 동쪽에서 주춧돌이 발견됐고 기와 조각이 출토돼 궁남지가 궁성의 원지(苑池)였고 주춧돌은 별궁 건물의 흔적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또 무왕 39년(638년)에 “3월에 왕은 비빈과 더불어 큰 연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록도 나올 만큼 규모가 작지 않은 못이다.


어쨌거나 새벽에 찾은 궁남지에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산책하는 사람들의 발길만 이어지고 있을 뿐 새벽 물안개도, 연꽃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김이 빠진 취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솟아오른 해가 비춰주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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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자 늦잠을 실컷 자고 나온 패들이 “궁남지 보러 가자”고 부산을 떨었다. 이미 한 번 섭렵한 곳이라 내키지 않는 마음을 달래며 마지못해 따라 나섰는데, 웬걸 아침에는 연잎만 덮여 있던 궁남지에 연꽃이 만개해 있었다. 그제서야 안내문에 적혀 있는 ‘수련’의 ‘잠잘 수(睡)’자가 눈에 들어왔다. 수련의 꽃은 밤에는 잠을 자고 해가 떠야 꽃을 피운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수련의 ‘수’를 ‘물 수(水)’자로 잘못 알고 살아온 무식을 짐짓 아닌 체 시치미 떼야 했다.

◇정림사지와 오층석탑=사적 301호인 정림사지는 부여 번화가에 자리 잡고 있다. 538년 백제 성왕은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을 중앙과 동·서·남·북 등 5부로 분할했다. 그리고 그 안에 왕궁과 관청·사찰 등을 건립하면서 사비도성 중심지에 정림사를 건설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성왕이 정림사와 왕궁을 인근에 배치한 것은 중국 북위가 낙양성 내 황궁 인근에 영녕사를 배치한 것과 비슷하다”며 “백제가 사비도성을 축조할 때 북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정림사지를 상징하는 구조물은 오층석탑이다. 1층 탑신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 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전문가들은 이를 근거로 정림사는 백제 왕실 또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였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오층석탑은 장구한 세월을 떠받쳐온 만큼 탑신이 부분적으로 틀어져 있는 모습이다. 이에 따라 문화재 당국에서는 탑신에 센서 등을 부착해 온도를 체크하고 있다. 온도에 따라 탑신의 형태가 틀어지는 것을 예방하려는 시도인 듯했다.

한편 오층석탑은 초층 하부에 있는 소정방의 평제기공문(平濟紀功文·소정방이 백제를 멸한 기념으로 새긴 글)으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평제탑(平濟塔)’으로 불렸다. 그러나 1942년 일본학자 후지사와 가즈오가 발굴조사 중 발굴한 기와 조각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근거로 태평 8년인 고려 현종 19년에 정림사로 불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절터는 ‘정림사지’로, 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불리고 있다. /글·사진(부여)=우현석객원기자

최수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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