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미완의 멕시코 혁명



1910년 11월 20일 오전 8시. 멕시코 전역에서 횃불이 솟아올랐다. ‘농지개혁과 노동조건 개선, 외국인 특혜 폐지’를 내걸고 저항하던 정치 지도자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봉기 시한으로 못 박은 이날 도시와 농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거리로 나섰다. 20세기 최초의 시민혁명인 멕시코혁명이 발생한 순간이다.

혁명의 원인은 쿠데타로 권력을 잡아 33년간 장기 집권한 포르피리오 디아스 대통령에 대한 염증. 집권 초기 눈부신 경제 성장으로 권력기반을 다졌던 디아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인심을 잃었다. 대지주에게 땅을 몰아주고 외국계 자본을 끌어들여 공장을 세운 후 노동 운동을 탄압한 탓이다.

마침 미국의 멕시코산 사탕수수 관세 인상, 흉년과 식량난이 겹쳐 생활고가 심해지자 민중은 총과 몽둥이를 들었다. 혁명의 불을 당긴 정치인 마데로는 빈민 구제와 사회 변혁 운동을 펼치며 1908년에는 풍자소설 ‘1910년 대통령 왕위계승’을 펴내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올랐던 인물. 디아스 정권은 갖은 죄목으로 마데로를 지지자 5,000여명과 함께 체포해 가뒀다. 간수와 함께 탈옥한 마데로는 결국 정권을 뒤엎었다.


혁명을 통해 대통령직에 오른 마데로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인기도 떨어졌다. 토지개혁을 무기한 연기하는 등 구체제에 안주한 그에게 멕시코 국민들은 등을 돌렸다. 1913년 군부가 총부리를 돌려 마데로가 숨진 뒤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장군에 의해 멕시코는 디아스 체제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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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혁명세력은 재집결해 군사정권을 1년 만에 쫓아냈으나 문제는 내부 갈등과 경제의 대미(對美) 종속. 카란샤와 사파타ㆍ비야 등 혁명지도자들의 갈등으로 내전이 그치지 않았다. 오브레곤과 카예스ㆍ카르데나스 등이 번갈아 대권을 잡으며 농지개혁이 진행되고 정치적 안정을 찾았어도 경제의 미국 의존도는 더욱 높아져 갔다. 1869년 발견된 유전조차 멕시코 경제를 살찌우기보다 대미 경제 종속을 심화시켰다.

결국 멕시코는 1938년 석유 국유화를 선언하고 미국은 1941년 11월에야 이를 받아들였다. 멕시코 혁명도 비로소 끝났다. 31년 동안 100만명이 희생됐건만 멕시코 혁명은 아직까지도 미완성인지 모른다. 혁명을 야기한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여전하고 가난은 고착화했다. 2000년에는 70년 만의 정권교체가 일어났지만 부패는 그대로다. 한번 잘못된 구조의 생명력이 질기디질기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최근 세계적인 불경기 속에서도 멕시코 경제는 상대적으로 낫다는 사실. 낮은 인건비를 경쟁력 삼아 북미 자동차 생산의 거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멕시코 혁명 105주년을 밝혀주는 곳간의 풍요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권홍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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