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레빗 타운...‘헬 조선’



1947년7월1일, 뉴욕주 롱아일랜드. 미국 역사상 최대규모의 단독주택단지 공사가 첫 삽을 떴다. 단지 총면적은 4.07㎦(122.4만평). 맨해튼에서 40㎞ 거리의 토마토 농장을 사들인 ‘레빗 부자 회사(Levitt & Sons)’는 모두 1만7,447세대의 단독주택을 짓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공사비도 많이 들었다. 모두 5,000만 달러(요즘 가치 9억1,400만 달러 상당·비숙련공 임금 상승률 기준). 당시로는 거액이었다.

레빗 부자(父子)의 부동산 개발사업은 대박을 터트렸다. 완판(完販)하며 너무 무모한 투자라는 우려를 날려버렸다. 성공의 비결은 세 가지. 무엇보다 앞을 보는 눈이 있었다. 대공황 시작 무렵에 주택사업에 뛰어든 러시아계 유대인 아브라함 레빗은 극심한 경기 침체 속에서도 중대형 단독주택을 지어 짭짤한 수익을 거뒀던 인물. 연평균 150만채에 이르던 미국의 연간 주택 신규공급이 전쟁 기간 중에 사실상 중단된 만큼 수요가 폭발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두 번째, 팀워크가 뛰어났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공정 단순화를 통한 공기 단축의 선수였다. 전쟁 기간 중 미 해군 건설단 중위로 복부하고 돌아온 첫째 아들 윌리엄은 자금조달과 세일즈에 뛰어났다. 윌리엄의 동생인 알프레드는 설계와 조경에서 발군이었다. 세 부자에게는 협조자도 많았다. 은행들은 돈을 빌려주고 담당 관청은 관련 시행령을 고치면서까지 각종 규제를 풀어줬다.

세 번째 요인은 보다 결정적이었다. 값이 쌌다. 대지 150평, 건평 22평 주택이 7,990달러. 4인 가구의 평균소득이 연 6,808달러이던 시절이다. 마침 연방주택청과 제대군인원호청이 참전용사들에게 장기저리의 주택자금 대출을 대주던 시절,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주택을 살 수 있었다. 주택 가격의 10%만 내고 월 57달러씩 갚아나가는 프로그램까지 있었으니까.

레빗 교외주택 표준형의 구성은 침실 두 개에 거실과 부엌. 차고도 없었으나 확장성은 뛰어났다. 대지가 넓어 살면서 아이가 늘어나면 얼마든지 증·개축이 가능했다. 2층도 쉽게 올릴 수 있었다. 당시까지는 주택을 전문적으로 짓는 기업이 없어 소규모건축업자들이 1년에 4채 정도 집을 만들 때 레빗은 하루에 40채를 쏟아냈다. 비결은 분업에 있었다. 각 분야의 전문인력이 컨베이어벨트처럼 이동하며 뚝딱 집을 만들어냈다. 색깔별 페인트공을 따로 둘 정도였다.

흑인에게는 분양하지 않는다는 인종차별 시비에도 레빗에게는 전국적인 찬사가 쏟아졌다. 제2·제3의 레빗 타운이 생기고 다른 업자들도 모방에 나섰다. 붙박이장과 냉장고ㆍ가스레인지 등 기본 품목으로 들어간 내장품은 가구와 가전 등 관련산업의 호황도 이끌었다. 캐리어사가 개발한 에어컨이 대중화한 것도 레빗 타운의 기본사양으로 채택된 1950년 이후다. 한창 때에는 16분마다 주택 한 채를 완성했다는 레빗부자회사는 사업을 접을 때까지 주택 14만채를 지었다.


레빗의 주택 사업은 단순한 사업에 그치지 않았다. 레빗 타운과 비슷한 교외주택들이 미국 대도시 주변마다 들어서고 ‘교외주택 문화’가 생겼다. 본격적인 사업을 펼친 지 3년 만인 1950년 7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커버스토리로 윌리엄 레빗을 소개하며 ‘새로운 생활방식을 팝니다(For Sale: a new way of life)’라는 제목을 붙였다. 요즘도 그는 ‘교외의 발명자’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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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은 좋지 않았다. 1967년 60세 나이의 윌리엄은 회사를 ITT사에 9,200만 달러(요즘 가치 6억8,000만 달러·대부분 ITT사 주식)를 받고 넘겼다. 1972년까지 ITT사의 고용 사장으로 일했던 윌리엄은 대형 호화요트를 사고 아프리카 몇몇 국가의 주택사업에 투자했다가 쫄딱 망해 쓸쓸한 노년을 보냈다.

사람은 가도 주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서민단지로 시작한 레빗 타운은 오늘날 중상층 주거지역으로 꼽힌다. 침실 6개짜리로 개조하고도 마당이 넉넉하다. 손을 좀 본 집들은 최소한 10만 달러 이상이다. 레빗사가 사업을 처음 벌린 롱아일랜드의 레빗 타운은 맨해튼과의 접근성 덕에 30~65만 달러를 호가한다.

웬만한 중산층이면 교외에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었던 레빗 타운은 요즘 세대에게는 꿈 같은 얘기다. 금융 지원도 없고 가격도 예전 같지 않다. 정부 돈으로 대학에서 공부하고 주택을 마련한 당시 젊은이들은 열심히 사랑하고 미래를 꿈꿨다. 자연스럽게 ‘베이비 붐’ 현상이 일어났다. 현대 경영학의 스승격인 피터 드러커가 ‘미국 지식사회의 기반’이라고 불렀던 때가 바로 이 시기다.**

답답하고 미안한 감정이 밀려온다. 입시난과 높은 등록금, 취업난에 결혼과 출산을 기피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봉착한 우리의 젊은 세대를 생각하니.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레빗의 교외주택은 마침 미국의 대규모 도로정비계획, 특히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핵 전쟁에 대비한다며 전국적으로 확충한 주간고속도로망 덕도 봤다. 도로와 자동차, 교외주택이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지며 미국의 문화를 형성한 셈이다.

** 레빗의 교외주택이 미국을 안에서 멍들게 만들었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경희대학교 사학과 박진빈 교수의 연구논문 ‘미국의 교외는 어떻게 악몽이 되었나’(도시사학회 전자저널, 도시연구 제 6호 수록·2011년12월)에 소개된 미국 학자들의 책자와 논문에 따르면 레빗 타운을 위시한 교외주택단지는 무수한 부작용을 구조적으로 토해냈다. 레빗 타운이 표방하는 미국적 삶의 이상은 오로지 백인에게만 허락됐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 사회의 사회적 계층화와 분열이 자리잡았다. 로널드 레이건이라는 기독교 근본주의적 정치인이 등장하게 된 배경도 백인 중심의 교외 주택과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캘리포니아주의 재정을 망가뜨린 원인으로 지목되는 1978년 6월 ‘주민발의 13(Proposition 13)’도 교외주택 소유자들의 부단한 정치의 결실이었다고 한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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