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老兵)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이 문구는 전쟁영웅 더글러스 맥아더가 남긴 말이다. 그는 6.25전쟁 당시 한국군의 승리를 이끈 인천상륙작전의 수장이다. 국군과 유엔군이 전쟁 초기 수세 국면에서 벗어나 반격을 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된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알아보자.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기습 남침으로 38선을 넘어왔다. 국군의 육탄전에도 불구하고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고 낙동강까지 밀렸다. 북한군은 남진을 계속하다 국제연합군의 참전으로 낙동강에서 교착 상태를 맞게 됐다.
이때 맥아더 장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위기를 타개하고 북한군의 배후를 강타한다는 내용의 작전 구상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이 계획은 맥아더 장군이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할 무렵 구상되었던 작전으로 전세를 살피며 지속적으로 보완·발전시켜 나갔다. 낙동강 전선에서 위기를 타개하고 북한군의 배후를 강타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 수단은 적 배후에서 상륙 작전을 감행하는 것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상륙예정지인 인천은 서울로 접근할 수 있는 최단거리 항구이며, 수도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적에게 심리적으로 타격을 가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또한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 전면적인 반격에 나섬으로써 북한군 주력군을 앞과 뒤에서 공격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 작전이 시행될 예정인 인천항은 지형 등 자연적 조건이 대규모 상륙작전을 하기엔 불리하다는 약점으로, 미 합동참모본부와 해군 및 해병대 측은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상륙지점인 인천 앞바다는 간만의 차가 매우 심해 작전 진행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제한적인 해상 접근로, 연이어 벌어질 시가지 교전 등 작전실행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적은 후방을 무시하고 있고, 병참선이 과도하게 앞서 나가 있으므로 서울에서 신속히 이를 차단할 수 있다. 그들의 전투부대는 사실상 낙동강 일대의 제8군 정면에 투입돼 훈련된 예비 병력마저 없어 전세를 회복할 능력이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략적, 심리적, 정치적 이유를 들어 수도 서울을 단시일에 탈환하기 위해서는 인천에 상륙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맥아더 장군의 이러한 결단에 힘입어 합동참모부는 결국 8월 작전 계획을 승인했다.
상륙부대인 제10군단 알몬드 소장을 군단장에 임명하고, 예하에 미 제1해병대 사단과 미 제7사단, 국군해병연대, 국군 제 17연대 등 총 병력 7만5,000여명을 편성됐다.
인천상륙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상륙 지역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중 폭격이 9월 4일부터 15일까지 계속됐다. 9월 15일 한·미 해병대 작전군은 전격 해안 상륙에 나서 인천을 점령하고 김포비행장과 수원을 확보함으로써 인천 반도를 완전히 수중에 넣었다. 이후 한국 해병 대대와 미 해병사단은 18일부터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고 20일 주력부대가 한강을 건너 27일 정오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작전을 끝냈다. 당시 북한군의 인천지역 병력규모는 지역 경비대대를 포함해 2,000여명에 달했고, 서울-인천 지역에서 활동 중인 적의 병력은 약 10만여명으로 추정됐다.
수도 서울은 전쟁 개시 90일 만에 수복됐으며 인천상륙작전은 한반도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역사적인 작전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됐다.
/신은동인턴기자 shined0226@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