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찌그러진 날의 진통제, 제육볶음

[식담객 신씨의 밥상] 열다섯번째 이야기-제육볶음





1985년 초여름, 장마가 시작돼 오늘처럼 비가 쏟아붓던 날이었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신대두 어린이는, 수업이 끝난 교실에서 빗자루질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퍽!”

갑자기 날아온 무언가가 얼굴을 가격했습니다.

한편에서 장난치던 녀석들끼리 던진 실내화가 하필 눈에 맞은 겁니다.

“대두야, 미안해.”

이강봉, 작은 체구에 태권도장에 오래 다녀 몸이 날랜 아이였습니다.

녀석이 다가와 조심스런 표정으로 슬쩍 웃으며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웃음이 얄밉게 보였습니다.

눈에 불이 번쩍할 정도로 실내화짝에 맞고, 괜찮다며 손을 꼭 잡아줄 성인군자 어린이는 흔치 않습니다.

“아, 너 일로 와봐!”

한 손으로 눈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녀석을 잡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선제공격이 들어왔습니다.

태권도 3품이란 녀석이 호랑이권법을 구사했습니다.

이 자식이 발톱, 아니 손톱으로~

내 얼굴은 녀석의 할큄질에 엉망이 되었습니다.

놓으라고 밀치다가 더 쥐어뜯겼습니다.

선생님은 둘 다 똑같이 잘못했다며, 한참 동안 벌을 세운 후 반성문을 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억울했습니다.

열심히 청소하다가 아무 이유 없이 실내화에 눈을 맞아, 언성을 높였을 뿐입니다.

적반하장으로 얼굴이 손톱자국 투성이가 돼버렸는데, 똑같이 잘못했다니...

세상에 똑같이 잘못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그분을 보면 묻고 싶습니다.

“당신 눈엔, 6.25도 남북한이 똑같이 잘못해서 일어난 전쟁인가요? 연산군에게 칼 맞은 충신들도 똑같이 잘못한 겁니까?”

정말 분하고 억울한 기분으로 집에 왔는데,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내 얼굴을 보신 아버지 표정은 급격히 일그러졌습니다.

어떻게 된 거냐고, 어디 아픈 곳은 없냐고 묻는 대신, 몽둥이로 훈육을 시작하셨습니다.

“팍... 팍팍...팍팍팍... 퍽퍽... 퍽퍽퍽!”

“파바밧!”

나도 모르게 도망쳤습니다.


더 이상 맞고 있다간, 어딘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만든 현상이었습니다.

관련기사



숨이 가빠 더 이상 뛰지 못할 때까지 달렸습니다.

막상 달아나고 보니, 갈 곳이 없었습니다.

돈 한 푼은커녕 우산도 없는 슬리퍼 신세였습니다.

친한 친구 한두 녀석이 생각나긴 했지만, 어머니의 말씀이 되살아났습니다.

“비 오는 날엔 남의 집에 가는 거 아니야.”

하릴없이 학교 앞 성당 담벼락에 기대, 멍하니 비를 맞고 서 있었습니다.

어둑해질 무렵, 형이 나를 찾으러 왔습니다.

형 손에 이끌려 집에 가며 생각했습니다.

‘나는 오늘 이렇게 지옥에 가는 걸까?’

뜻밖에도, 집에는 몽둥이 대신 돼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고기 구경하기가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비에 쫄딱 젖어 오돌오돌 떨다가 먹는 따끈한 밥, 그리고 고추장으로 볶은 제육볶음은 나를 지옥 대신 천국으로 이끌었습니다.

돼지고기를 밥 위에 얹어서 입에 넣습니다.

쫀득한 식감과 매콤달콤 기름진 맛과 향이 입안에 감칩니다.

나중엔 걸쭉한 양념에 석석 밥을 비벼서, 꾸역꾸역 뱃속에 채워넣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행복에 불안하고 초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아버지는 더 이상 나를 때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리저리 억울하게 혼나고 두들겨 맞은 험한 날이었습니다.

그래도 맛있는 돼지고기를 먹고 따뜻한 잠자리에 들었으니, 다 잘된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먹은 매콤하고 기름진 돼지고기 볶음은, 몸과 마음을 낫게 해주는 약 같았습니다.



이튿날 감기에 된통 걸렸습니다.

병든 닭처럼 햇볕 아래 졸고 있는 나를 발견한 어머니는 황급히 병원에 데려가셨습니다.

40도가 넘는 체온기록을 세웠습니다.

의사선생님은 조금만 더 늦었으면, 심각한 뇌 손상이 왔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옛이야기를 들려드리기 어려웠겠죠.

제육볶음이란 진통제는 치료제가 될 수 없었나 봅니다.

/식담객 analogoldman@naver.com

식담객 신씨는?

학창시절 개그맨과 작가를 준비하다가 우연치 않게 언론 홍보에 입문, 발칙한 상상과 대담한 도전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어원 풀이와 스토리텔링을 통한 기업 알리기에 능통한 15년차 기업홍보 전문가. 한겨레신문에서 직장인 컬럼을 연재했고, 한국경제 ‘金과장 李대리’의 기획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PR 전문 매거진 ‘The PR’에서 홍보카툰 ‘ 미스터 홍키호테’의 스토리를 집필 중이며, PR 관련 강연과 기고도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홍보 바닥에서 매운 맛을 본 이들의 이야기 ‘홍보의 辛(초록물고기)’이 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