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이 제4 신용평가사의 조건부 진입을 허용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기업 신용평가 시장에 새로 진입을 원하는 업체가 일정 기간 시범 사업을 통해 검증을 받은 뒤 물적 요건(자본금·인원)을 갖추면 금융 당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는 방식이다. 국내 기업 신용평가 시장에서 지난 1986년부터 30년 동안 과점 체제를 유지한 기존 3사(한국기업평가(034950)·나이스신용평가·한국신용평가)의 반발을 최대한 누그러뜨리면서 업계의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 있는 대안으로 평가된다.
26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기업 신용평가 시장에 진출하려는 새로운 사업자에 대해 검증 기간을 거쳐 정식 인가를 내주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기업의 경영·재무현황을 확인해 주기적으로 등급을 매겨야 하는 신용평가사의 업무 특성을 고려해 시범 사업 운영 기간은 1년 이상이 될 것으로 전해졌다.
금융위는 28일 금융연구원이 주최하는 공청회를 통해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뒤 이르면 다음달 중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신용평가 제도 선진화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금융위를 비롯해 금융감독원·금융연·자본시장연구원·신용평가사 등이 모인 신용평가 선진화 태스크포스(TF)도 사실상 활동을 마무리 지은 상태다. TF는 그룹의 지원 여부와 관계없이 계열사의 자체 경영·재무현황만 평가하는 독자신용등급 제도 도입과 신용평가사의 공시 의무를 강화하는 방안 등을 논의했다.
제4 신용평가사 검증 체계는 적격 외부 신용평가기관(ECAI) 기준을 본보기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 ECAI는 국제결제은행(BIS) 바젤위원회가 제시한 국제 기준을 충족시킨 신용평가사를 말한다. BIS 바젤위원회는 2006년 은행 등 금융사의 자산건전성 규제 기준을 새롭게 정하면서 ECAI로 지정되지 않은 신용평가사의 신용등급을 활용할 수 없도록 했다. 이에 따라 국내 신용평가사 3사도 2007년 금융감독원으로부터 객관성·독립성·투명성 등을 검증받은 뒤 ECAI 지정을 받았다. 금융투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가장 최근에 금융 당국에서 적용한 신용평가사 검증 체계라는 점에서 재차 활용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제4 신용평가사의 유력 후보로는 서울신용평가와 에프앤(FN)가이드가 거론된다. 서울신용평가는 이미 자산유동화증권(ABS)·기업어음(CP) 등을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을 갖췄다. 회사채 평가 자격만 얻으면 기존 3사와 같은 기업 신용평가 사업을 할 수 있다. 에프앤가이드는 기업의 경영·재무정보를 기관·개인 등에 제공하는 금융정보업체다. 증권(채권)에 등급을 매겨본 경험은 없지만 대규모 기업 데이터를 보유한 것이 강점으로 꼽힌다. 만일 서울신용평가와 에프앤가이드 모두 시범 사업을 거쳐 검증을 통과하면 제5 신용평가사까지 나올 수도 있다.
다만 금융위가 기업 신용평가 시장의 진입 규제 완화와 관련, 1년 넘게 ‘오락가락’ 행보를 보였다는 점에 대해 업계에서는 불만의 목소리도 나온다. 금융위는 지난해 6월 개최한 신용평가 산업 발전방안 토론회에서 신규 업체 진입 요구에 해외 사례를 살펴본 뒤 검토해보겠다는 견해를 밝혔으나 올해 초에는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 이후 신용평가 3사가 현대상선(011200)·대우조선해양(042660)의 신용등급을 ‘뒷북’ 강등하는 등 기존 제도의 문제점을 드러내자 금융위 내부의 기류가 다시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신용평가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구조조정 국면에서 기존 신용평가 3사가 ‘워치독(감시견)’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자 새로운 ‘플레이어’의 진입이 필요하다는 점에 금융 당국이 뒤늦게 공감대를 형성한 셈”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