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인수합병(M&A)은 부족한 사업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아주 뛰어난 경영 기법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기업들은 아직 M&A를 적재적소에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비해 인식이 많이 개선됐지만 여전히 소극적입니다.”
대형 회계법인에서 기업 M&A 자문 업무를 맡고 있는 한 임원은 최근 대기업 임원과 만나 얘기를 나눠본 뒤 M&A에 대한 인식이 생각했던 것보다 낮아 놀랐던 적이 있다고 했다. M&A가 플러스의 경영 기법이 아닌 무언가를 잃고 빼앗긴다는 식의 마이너스 경영 방식으로 보는 기업들이 의외로 많다고 이 임원은 설명했다.
자본시장연구원이 낸 보고서를 보면, 국내 M&A 시장은 지난해 875억달러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는 순수한 목적의 기업 간 M&A 라기보다 재벌의 지배구조 개편, 경영권 승계 등을 위한 그룹 계열사 내에서 발생한 M&A가 활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나마도 국내 기업이 해외 기업을 M&A한 경우는 극히 드물어 전체 거래 가운데 국내 기업 간 M&A 거래 비중이 92.3%에 육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우리나라의 풍토를 고려할 때 최근 일본 소프트뱅크가 무려 36조원을 쏟아부어 영국 반도체 설계회사 암(ARM)을 인수한다는 소식을 듣고 ‘도대체 왜’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미래 기술을 확보하는 사례가 한국에서는 낯설기 때문이다. 소프트뱅크는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95%에 가까운 시장 점유율을 보유한 암을 인수함에 따라 사물인터넷(IoT) 등 미래 먹거리 사업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게 됐다. 소프트뱅크가 노린 것은 암의 모바일 칩 설계 능력이었다. 소프트뱅크는 M&A의 마법을 통해 암이 보유한 핵심 기술과 연구개발(R&D) 인력, 노하우를 얻게 된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성 정도가 아웃바운드(한국 기업의 해외 M&A)를 통해 핵심 기술과 R&D 인력을 확보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루프페이 인수가 대표적이다. 루프페이는 스마트폰을 카드리더기에 가져다 대기만 해도 결제가 이뤄지는 마그네틱보안전송(MST) 관련 핵심 특허를 가진 미국의 벤처 스타트업이다. 삼성전자는 루프페이 인수를 통해 ‘삼성페이’를 출시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는 단 한 번의 절묘한 M&A로 혁신 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인수, 모바일 결제라는 새로운 사업에 보다 쉽고 빠르게 뛰어들 수 있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주요 연구소 조직을 통폐합한 것을 비롯해 DMC연구소를 사실상 해체에 가까운 수준으로 대폭 축소 시켰다. 대신 핵심 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M&A하는 방식으로 R&D 역량을 강화하는 전략을 취하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기술은 사오면 된다’는 식의 발상에 대한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M&A를 통해 R&D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을 내린 것은 거의 처음이다.
삼성이 핵심 기술을 보유한 기업에 대한 소규모 M&A를 통해 R&D 역량을 강화했다면 두산은 M&A로 기업의 색깔을 카멜레온처럼 바꾼 대표적인 기업이다. 두산은 IMF 외환위기로 회사가 어려움에 빠지자 주력 사업이던 소비재 사업(OB맥주)을 접고 중장비와 기계 등 인프라 사업으로 기업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M&A가 잇따랐고 소비재 기업이던 두산그룹의 매출 비중은 인프라 지원 사업이 이제 95%에 달한다.
이처럼 절묘한 한 건의 M&A가 기업의 운명을 좌우하는 핵심 경영 기법임에도 기업들의 M&A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대외 여건마저도 M&A에 대한 의지를 꺼뜨리고 있다. 중국의 경제 성장 둔화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 보호무역주의 기조 강화 등 불확실한 대외 경영 환경이 M&A를 통한 공격 경영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자본시장실장은 “국내 대기업들이 M&A를 통해 신성장 동력을 확보하겠다는 인식이 아직은 부족한 측면이 있다”면서 “이는 우수한 기술력을 보유한 바이오나 IT 벤처 창업의 동력을 약화 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