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금융실명제 전격 발표



1993년8월12일 오후 7시45분 청와대. 긴급 국무회의를 마친 김영삼 대통령이 마이크를 잡았다. 대통령의 특별 담화에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내용이 담겼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 이뤄집니다.’ 금융실명제 도입이 논의된 게 처음이 아니었음에도 왜 놀랄만한 일이었나. 역대 정권이 실행하지 못한 금융실명제 실시가 누구도 예상 못한 가운데 전격 발표됐기 때문이다. ‘깜짝 쇼’를 좋아하는 YS 다웠다.

금융실명제 도입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논의된 것은 1982년. 장영자 부부 어음 사건으로 민심 이반에 직면한 5공 정권은 모든 금융거래에 실명제를 도입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강경식 당시 재무부장관은 ‘7·3조치’를 발표하면서 ‘1983년부터 금융실명제를 전면 실시한다’는 일정까지 못 박았다. 금융실명제법은 국회까지 통과했으나 집요한 반대에 부딪쳤다. 급기야 1982년말 전두환 대통령은 물러서고 말았다. ‘86년 이후 대통령이 정하는 날 시행한다’는 단서만 남겼다.


노태우 정권도 마찬가지. 금융실명제 시행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노태우 대통령은 서울올림픽 직전이던 1988년 7월, ‘1991년까지 금융실명제를 도입한다’며 공약을 재확인했다. 이듬해 4월에는 재무부에 ‘금융실명제 실시 준비단’도 들어섰다. 반대 목소리도 민주화 분위기를 타고 예전보다 훨씬 커졌다. 전경련은 경제 침체의 원인이 금융실명제 실시에 대한 불안감 탓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제 상황은 실제로 좋지 않았다. 취임 첫해인 148억 달러였던 무역수지 흑자가 89년에는 53억 달러로 줄고 90년에는 14억 달러 적자로 반전됐으니까. 주식투자자들의 불만은 더욱 컸다. 사상 처음으로 종합주가지수 1,000포인트 선을 돌파한 이래 주가는 속절 없이 무너지며 한국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증시를 부양하는 사태(12·12 한은특융)까지 이르렀다. 투자자들은 1990년 들어서도 계속된 주가 하락의 원인을 시행 예정인 금융실명제로 돌렸다. 급기야 1990년 4월 이승윤 경제부총리와 김종인 청와대 경제수석은 실명제 유보 결정을 내렸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들어서도 경제 상황은 좋지 않았다. 후보 시절 실명제 도입을 강조하고 당선 직후 개혁을 강조했으나 누구도 전격 시행은 예상하지 못했다. 비밀리에 실명제를 준비하던 이경식 경제부총리는 ‘실명제는 임기 중반 이전에 시행될 것’이라며 연막을 피웠다. 김영삼 정부의 핵심 관료들은 ‘실명제를 실시할 여건이 못된다’는 여론에 대해서도 알아듣기 쉬운 논리를 펼쳤다.


YS의 경제 실력을 감안해 이해하기 쉬운 정책 설명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 재무부 고위관료는 ‘목욕탕 수리론’을 주창했다. 손님이 없는 여름에 목욕탕을 수리를 하는 것처럼, 각종 개혁도 경제가 안 좋을 때 해치워야 한다는 논리였다. 연막과 논전 속에서도 재무부의 금융실명제 실무팀은 철저한 보안 속에 전격 시행의 그림표를 채워넣었다.* 노태우 정부 시절 실시준비단이 마련한 자료를 토대로 한 달 동안 과천의 한 아파트에서 합숙하며 최종안을 완성한 시기가 8월 초. 막판에 시행 시기(8월 또는 1월)를 놓고 고민했으나 실무팀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최종 보고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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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권자인 김영삼 대통령은 거칠 게 없었다.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으니까. 취임 11일 만에 단행한 ‘군내 사조직 하나회 숙청’ 직후에는 지지율이 92%에 이른 적도 있다. 공직자 재산 신고 의무화(5월)도 국민들의 열띤 호응을 받았다. 임기 첫 해 지지율이 80% 아래를 내려간 적이 없었던 YS로서는 야심차게 추진한 ‘신경제 100일’ 프로젝트가 별다른 성과가 없어 뭔가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없지 않다.

대통령의 긴급명령권 발동 형식으로 전격 시행된 금융실명제로 시장은 바로 얼어붙었다. 종합주가지수는 이틀간 59.27포인트 하락한 666.67포인트로 내려 앉았다. 반대로 금값은 뛰었다. 사채시장에서도 금리가 치솟았다. 실명제 반대론자들은 ‘그 것 봐라,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고 여겼으나 폭락세는 주말을 지나면서 수그러들었다. 정부의 초대형 증시부양책 발표 임박 풍문과 실명제로 갈 곳을 잃은 지하자금이 결국 주식시장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기대가 맞물린 덕분이다. 실명제 시행 직후 2개월의 의무기간 동안 실명으로 전환된 가명예금은 2조7,604억원. 가명으로 파악된 예금의 97.4%가 실명전환을 마쳤다.

실명으로 전환할 경우 5,000만원 한도까지는 출처조사를 하지 않는다는 방침에 따라 거액 가명 예금주들이 은행과 투자금융회사(단자사) 등에서 예금을 쪼개는 편법이 일어났을 뿐 금융실명제는 우려와 달리 자리를 잡았다. 해외에서도 한국의 금융실명제는 성공 사례로 손꼽힌다. 검찰도 금융실명제의 덕을 봤다. 불법 정치자금과 비자금을 추적하기가 훨씬 수월해진 것이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천문학적인 불법 비자금도 금융실명제가 아니었다면 들춰내기 어려웠다.

금융실명제 실시 23주년. 우리 경제는 이전보다 훨씬 투명해졌지만 갈 길이 멀다. 차명계좌의 존재가 그렇고 5만원권 등장 이후 늘어나고 있다는 불법 정치자금이 그렇다. 해외의 조세회피지역(Tax Haven)에 한국인 명의의 검은 돈이 많다는 점도 우리 사회의 건강 지표를 말해준다. ‘취지는 좋지만 수반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두려움’도 여전하다. 김영란법이 시행되기도 전에 개정 논의가 나오고 있으니. 제 돈으로 밥 먹고 과도한 선물을 주고 받지 않으면 그만인 것을.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보안을 위해 실무팀은 가족에게조차 외국 출장 간다고 속였다. 청와대 비서진은 물론 실명제에 적극적이지 않은 청와대 경제수석까지 배제됐다. 그럼에도 정보가 사전에 새나간 흔적은 있다. 발표 몇 시간 전인 12일 오후 3시경부터 일부 은행에서 가명의 거액 예금자들의 인출 사태와 잔고 부족 현상이 벌어졌다. 강남과 명동의 사채업자들 사이에도 5시쯤부터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설이 돌았다. 안테나를 총동원했던 일부 대기업 정보팀은 6시 무렵 긴급국무회의와 실명제 전격 발표를 회장실에 보고했다고 한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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