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8월23일 예루살렘 구시가지. 팽팽하게 이어지던 아랍계와 유대계 주민들의 대립이 살육을 동반한 폭력 사태로 번졌다. 갈등의 원인은 서쪽 벽(통곡의 벽) 예배 문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1928년부터 통곡의 벽에 남녀를 구분하는 칸막이를 설치한 게 발단이었다. 아랍인들은 분노했다. 예루살렘 성지 전체에 대한 종교적 관할권을 이슬람이 갖고 있던 터. ‘숫자가 늘어난 유대인들이 제멋대로 성소를 훼손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아랍 무슬림의 태도에 분개했다. 유대 민족 최대 비극인 ‘아브월 9일’*의 애도를 막는 ‘아랍인의 편협함’에 대놓고 대들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생각도 못할 행위였다. 예루살렘의 유대인은 극소수였으니까. 유럽 등지에서 박해받던 유대인들이 ‘고향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는 국제 시오니즘 운동으로 예루살렘의 유대인 인구는 크게 늘어났다.
시오니즘 운동에 기반한 알리야(Aliyah·유대인 귀환)가 본격화하기 직전인 18세기 초중반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은 불과 7~8만 수준. 246만 아랍인들은 물론 22만 기독교인보다도 적었다. 3차례 알리야 운동 막바지인 1922년에는 84만으로 불었다(아랍인 인구 역시 589만으로 증가했다). 새로 들어온 유대인들은 원주 유대인과는 전혀 다른 생활 습성을 갖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계 유대인들은 공산 혁명을 경험한 급진파가 많았다.
생활을 자연에 맡기는 아랍 무슬림과 비슷하게 살아가던 원주 유대인들은 이주 유대인들로부터 새로운 생활방식을 강요받았다. 이주 유대인들이 원주 유대인의 사고와 생활방식을 ‘해악’으로 규정하고 아이를 빼앗아 공동체에서 양육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선민의식에 유럽 특유의 우월의식까지 겹쳐 동포에게도 새로운 생활 규범을 강요하는 이주 유대인들은 인구가 많은 아랍인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국제적 영향력과 경제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인구는 훨씬 적었어도 국제 무대, 특히 1917년부터 팔레스타인을 위임 통치한 영국에 대한 로비력은 어느 민족보다 뛰어났다. 팔레스타인의 경제력도 야금 야금 먹어들어갔다. 아랍인 지주에게 땅을 사들여 5% 가량을 점유하기에 이르렀다. 경작 가능한 토지는 12% 이상 유대인의 손에 넘어갔다. 문제는 유대인이 땅을 소유하면 아랍인 소작인들이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는 점.
아랍인끼리 토지 매매는 소유권만 옮겨갈 뿐, 땅을 부쳐 먹는 소작농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됐으나 유대인은 직접 경작하기 위해 땅을 샀다. 아랍 소작인들은 모든 꿈을 잃었다. 돈을 모아 내 땅을 살 수도 없었다. 유대인들의 끊임없는 토지 매입으로 땅 값이 폭등했으니까. 아랍 농민들의 고통과 도시 빈민화 추세에도 팔레스타인의 경제는 호황을 누렸다. 1920년대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에게 땅을 판 아랍인 유력 가문의 전성기였다.** 땅이 많은 일부 아랍인 유력 가문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반겼다.
‘부유하고 근면한 이웃’의 증가를 바라보던 아랍인들의 불만이 최초로 불거진 시기는 1921년 5월. 사소한 충돌로 시작돼 아랍인들이 유대인 정착촌을 공격해 여덟 명이 죽었다. 영국 군경의 과잉 진압이 인명 피해를 키웠다. 적지 않은 사람이 죽었어도 당시 소요는 큰 후유증 없이 끝났다. 두 민족은 바로 평화 상태를 회복해 8년간 큰 충돌 없이 지냈다. 잠잠해지는가 싶었던 갈등은 인구가 불어난 유대인들의 통곡의 벽 개수 논란으로 인해 불거졌다.
유대 전통에 따라 통곡의 벽에 남녀를 구분하는 칸막이 설치하려던 시도가 막힌 뒤 유대인들은 기회를 엿봤다. 1929년 8월 중순 유대인 6,000명은 다윗의 별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하티크바(Hatikvah·1948년 독립하며 이스라엘 국가로 비공식 채택, 공식 채택은 2004년)를 부르며 소리 내 외쳤다. ‘서쪽 벽(통곡의 벽)은 유대인의 것이다.’ 과격파 청년 300여명은 아예 통곡의 벽에 올라 다윗의 별 깃발을 올렸다.
경제 침탈을 우려하던 아랍인들은 무슬람의 종교적 성소인 예루살렘*까지 빼앗길 것이라고 걱정했다. 통곡의 벽은 두 민족으로 인해 두 얼굴을 갖게 됐다. 조상의 땅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통곡의 벽은 자유와 미래를 향한 희망의 아이콘이었다. 아랍인들에게는 옛 영화와 전통, 더 이상 빼앗기지 않겠다는 저항의 상징이었다. 유대인의 대규모 시위 하루 뒤, 아랍인 2,000명이 통곡의 벽에서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때리고 몰아냈다.
양측의 감정이 격화하는 가운데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유대인 소년 하나가 찬 축구공이 아랍인의 정원으로 들어갔다. 소년은 난자 당했다. 장례식에 운집한 유대인들은 용의자를 조사하려는 아랍인 영국 경찰을 때렸다. 무슬림 구역을 공격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양측의 감정은 더욱 나빠졌다. 문제의 8월23일, 금요기도회를 마친 아랍인들이 선제 공격을 퍼부었다. 헤브론에서만 59명의 유대인이 학살 당했다. 유대인들도 보복에 나섰다.
엿새간 이어진 유혈 투쟁에서 유대인 133명과 아랍인 116명이 죽었다. 유대인들은 주로 아랍인들에 죽임을 당한 반면 아랍인들은 진압차 출동한 영국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다. 부상자는 유대인 198명과 아랍인 232명. 병원 시설의 도움을 받지 못한 탓에 아랍인들의 피해가 유대인보다 조금 많았다. 진상 조사에 나선 영국은 1,2차 보고서를 통해 ‘대규모 유혈 사태의 원인을 아랍인들이 제공했으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유대인들의 경제 침탈 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영국은 이후에는 불분명하고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두 민족 간 불화를 심화시켰다. 1929년 발생한 통곡의 벽 사건 이후 아랍과 유대인들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버렸다. 1936년에도 아랍인들은 대규모 팔레스타인 봉기를 일으켰다. 영국은 더욱 우유부단한 정책을 펼쳤고 결국 경제력과 국제정치 무대에서 로비력이 강한 유대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 국가를 세웠다.
아랍과 유대인, 같은 피를 공유하는 성서의 민족끼리 증오로 맞붙었던 1929년 통곡의 벽 사건 87주년.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신음한다. 지구촌도 불안하다. 이스라엘 국가의 군사력과 유대인의 국제적 영향력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지만 평화는 여전히 요원하다.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아랍국가들과 싸워 연전연승한 이스라엘은 앞으로도 승리를 이어갈 수 있을까. 백번 싸워 한 번이라도 진다면, 어떤 참극이 일어날까. 두렵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되 더 이상 통곡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좋으련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아브월 9일(the ninth day of the month of Av)은 히브리 달력으로 다섯 번째 달의 9일을 말한다. ‘티샤베아브(Tisha Be‘Av)’로도 불리는 이날을 유대인들은 고난일로 기억한다. 기원전(BC) 585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기원후(AD)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의 성전 2차 파괴가 바로 아브월의 9일, 655년 시차를 두고 발생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 당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 날도 1086년의 아브월 9일이었다. 영국의 유대인 1차 추방(1290), 프랑스의 유대인 추방(1306)과 에스파냐의 대규모 유대인 추방령(1492)도 아브월 9일에 일어났다.
예루살렘에서 살던 원주 유대인들이 유대 국가 멸망 이후 서유럽에서 유대인들의 시련을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다만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들은 적어도 12세기부터는 통곡의 벽 예배를 아브월의 9일에 한해 공식적으로 허용받았다. 무슬람 통치자가 베푼 최소한의 아량 덕분이다. ‘만들어진 전통’의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브월 9일에 통곡의 벽에서 흐느끼고 기도하는 풍습은 유대인들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시작도 아브월 9일이다.
** 땅을 팔아 떵떵거리는 졸부는 아니었으나 명저 ‘오리엔탈리즘’을 지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부친과 그 형제들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큰 서점을 운영했다고 한다.
*** 예루살렘은 메카, 메디나와 함께 무슬람 제 3의 성지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인간의 얼굴을 한 말 부라크를 묶어두고 하루 동안 지나간 곳이라는 예루살렘을 무슬림은 1,200년간 사실상 지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