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위 선사인 한진해운의 운명을 가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결단이 임박했다. 조 회장의 선택에 따라 한진해운은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신청 이후 사실상 파산 절차에 들어가거나 다시 한 번 기사회생의 기회를 잡게 된다.
24일 해운업계와 채권단 등에 따르면 한진해운은 ‘4,000억원+α’ 수준의 자구안을 마련해 이를 25일 산업은행에 제출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동시에 금융당국은 당초 “신규 자금 지원은 없다”는 입장에서 한 발짝 물러나 시나리오별로 한진해운 회생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한진해운이 일단 법정관리 위기에서 벗어나 당분간 시간을 벌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 회장은 자구안 제출을 코앞에 둔 이날까지도 추가 유동성 확보 방안에 대해 막판까지 고심을 거듭했다. 산은 등 채권단은 최소 7,000억원 이상의 그룹 지원이 있어야 한진해운이 유동성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압박했지만 그룹 내부에서는 “도저히 이만한 자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다”는 목소리가 컸던 탓이다.
아버지를 보필해 그룹 경영 전반을 살피고 있는 조원태 대한항공 총괄부사장(대표이사)는 이날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현 시점에서 아무 말도 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만큼 고민의 강도가 크다는 얘기다.
현재 재계에서는 한진그룹이 1,000억~2,000억원 수준의 추가 유동성 확보방안을 채권단에 제시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한진해운 대주주인 대한항공이 유상증자를 통해 마련하기로 한 4,000억원에 이를 더하면 총 5,000억~6,000억원가량의 현금을 그룹이 지원하는 셈이다.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한진 측에서 4,000억원 이상은 어렵다는 뜻을 전달하면 (여론의) 부담 없이 법정관리에 보낼 수 있어 오히려 문제가 단순해진다”며 “그룹의 지원 액수에 따라 다양한 대응 방안을 수립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당국 역시 지원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임종룡 금융위원회 위원장과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 등이 직접 나서 신규 자금 지원은 없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했지만 그렇다고 법정관리를 선택하기도 어려워서다.
해운업이 육·해·공군에 이어 ‘제4군’으로 불릴 정도로 국가 보안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고 당장 수출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게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부산항이 위치한 영남 지역 경기에도 한진해운 파산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한국선주협회는 부산항에 외국 해운사들이 들어오지 않을 경우 관련 업계에서 약 18조원의 매출 손실이 발생하고 5,400여명의 근로자들이 실업 위기를 겪을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
조 회장이 ‘결단’을 내릴 경우 한진그룹이 어떤 방식으로 지원 자금을 마련하느냐도 관건이다. 한진해운은 지난 6월 발표한 자구안과 별도로 아시아 항로 운영권과 베트남 터미널 지분 등을 ㈜한진에 매각하고 노후 장비 등을 잇달아 내다 팔면서 총 1,064억원을 추가로 확보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팔아 치울 자산도 없다는 게 한진해운 측의 설명이다.
다만 대한항공이 당초 제시한 유상증자 규모(4,000억원)를 더 늘려 잡아 부족자금을 메우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대한항공의 최대 주주는 한진그룹 지주사인 한진칼(31.0%)이며 한진칼은 조양호 회장(17.67%), 국민연금공단(11.35%), KB자산운용(9.90%), 한국투자신탁운용(6.69%) 등이 지분을 나눠 갖고 있어 대대적인 유상증자를 추진할 경우 주주들의 반대에 부딪힐 수 있다.
결국 방법은 조양호 회장이 사재출연이나 현물 등을 사재로 출자하는 방안밖에 없다. 사재출연은 규모가 크지 않아도 현정은 현대 회장처럼 채권단의 지원을 끌어낼 수 있는 ‘명분’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조 회장이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사재의 규모 자체가 턱없이 적다는 것이다.
이런 줄기에서 한진과 금융당국 안팎에서는 한진이 5,000억~6,000억원가량을 최종적으로 마련하고 여기에 조 회장이 ‘성의를 다하는’ 수준에서 사재를 내놓는 선에서 극적인 타협점을 찾을 것이라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이밖에 한진그룹 계열 저비용항공사(LCC)인 진에어를 상장해 한진해운을 돕는 방안도 거론되는데 시일이 많이 걸려 단기 유동성을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 걸림돌이다.
한편 재계 일각에서는 조 회장이 한진해운을 포기할 수 있다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해운 시황이 도무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어 당장 수천억원을 쏟아 부어 시간을 벌더라도 장차 더 큰 위기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회사 매출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컨테이너선 운임 하락에 따라 한진해운은 올 상반기 3,446억원에 이르는 영업손실을 냈다. 영업손실이 예상보다 커지면 부족 자금 규모도 자연히 불어나 유동성 경색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
/서일범·이종혁기자 squiz@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