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일본 항공산업의 부활 YS-11





‘한국은 흥미로운 나라다. 누에고치에서 인공위성까지 만드는 만능 공업국인 일본과 경쟁을 마다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지 않을까.’ 국제 학술대회에서 십수년 전에 만났던 외국인 기자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맞는 얘기다. 일본이 뭘 한다면 우리도 해야 직성이 풀린다. 자동차가 그랬고 조선이 그랬다. 종합제철소와 반도체도 마찬가지다. 주요 제조업 분야에서는 딱 하나, 일본을 따라잡겠다는 엄두도 못 낸 분야가 있다. 항공산업. 그만큼 격차가 크다.


한국이 막 본격적인 경제개발에 착수한 직후인 1962년8월30일, 일본의 항공산업이 부활의 날개를 폈다. 순수 국산 중형 여객기 YS-11이 시험비행에 성공한 것. 일본 최초의 국산 여객기 YS-11은 아시아권 국가가 생산한 유일무이한 고유모델 여객기라는 기록을 46년간 지켰다. YS-11의 기록은 중국 COMAC(중국 상용항공기사)사가 2008년1월말 선보인 ARJ 21 중형 여객기에 의해 깨졌다. 중국이 지난 1980년 제트엔진 4발을 장착한 민수용 Y-10기를 개발한 적이 있었으나 미국 보잉사의 B-707 여객기를 분해, 역설계 조립한 기종에 불과하다. 신뢰도가 떨어져 단 3대를 시험 제작하는 데 그쳤다.

나고야 비행장에서 실시된 YS-11의 56분에 걸친 첫 비행은 성공적이었다. 1965년부터 양산된 64인승 기체는 출력 부족이라는 단점에도 긴 항속거리와 견고한 동체를 지닌 기종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롤스로이스 엔진을 제외하고는 독자적으로 설계·제작된 YS-11의 시제 2호기는 도쿄올림픽 성화를 운송해 일본인들에게 자긍심을 안겨줬다. 태평양전쟁의 전범 도조 히데키의 둘째 아들이 핵심설계를 맡았다는 점도 화제를 모았다.

민간용 여객기 YS-11의 제작사는 ‘일본항공기제조㈜’. 미쓰비시가 54.2%의 지배지분을 갖고 5개사가 출자하는 컨소시엄 형태의 회사로 1957년 결성됐다. 전액 민간 출자였으나 일본 국산 여객기 생산을 기획하고 이견을 조정한 것은 정부. 미 점령군 사령부의 항공기 설계··제조금지령이 풀린 1952년부터 기회를 모색하던 통산성(MITI·현 경제산업성)의 지휘 아래 일본 기업들은 폭격기와 수송기를 제작하던 엔지니어와 생산인력을 끌어모았다.

항공기 제작에서 미국과 영국, 독일 등에 뒤떨어졌던 일본은 태평양전쟁 직전에 제로센 전투기 등을 생산했으나 패전으로 생산 기반이 붕괴되고 기술자도 흩어진 상태였다. 한국전쟁이 터지며 미국제 F-86 전투기를 만들었으나 조립생산 수준이었다. 패전 직전까지 각종 군용기 설계와 생산에 투입됐던 인력들은 통산성의 국산여객기 개발 계획의 깃발 아래 다시 뭉쳤다. YS-11은 일본 항공산업 부활을 위한 국책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쉽지 않을 것’이라는 미국의 비아냥 속에 제작된 YS-11기의 성능은 기대 이상이었으나 문제는 영업력. 민수 판매량의 절반이 수출용(1969년 납북된 대한항공 여객기가 이 기종이다)이었지만 당초 예상에는 못 미쳐 해마다 적자가 쌓였다. 결국 미쓰비시·가와사키 등이 출자한 일본항공기제조㈜는 1973년 누적적자 360억엔을 안은 채 생산을 중단했다. 총생산은 182대. 손익분기점으로 잡았던 300대선을 훨씬 밑돌았다.


판매 성적으로 본다면 YS-11은 실패한 기종이 분명하지만 과연 그럴까. 보이지 않는 성과를 적지 않게 거뒀다. 우선 ‘만들자고 생각하면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일본 산업계에 퍼졌다. YS-11의 성능을 눈여겨본 미국과 유럽의 메이저 항공기제작사들은 일본업체로부터 부품 조달을 점차 늘렸다. 물론 일본제 부품 대량 발주에는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자칫 경쟁자로 부상할 수 있는 일본을 부품 생산에 묶어두려는 계산이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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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YS-11을 개발했던 인력들에게 다른 임무를 맡겼다. 군 수송기 개발을 의뢰한 것. 그 결과가 1970년 시험비행을 치른 가와사키 C-1 수송기다. 쌍발 제트엔진을 지닌 C-1 수송기 개발은 의미심장하다. 민간항공기 YS-11은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어도 결과적으로 군용 수송기 개발을 위한 선투자였던 셈이다. 일본 방위청(현 방위성)은 1972년 미국의 오키나와 반환에 앞서 최신형 국산 수송기를 보유할 수 있게 됐다. 가와사키사는 최근 대형화한 C-2 수송기를 개발, 항공자위대에 40대 이상을 납품할 계획이다.

일본이 독자생산을 포기한 후 한동안 어느 아시아 국가도 고유 모델을 선보이지 못했다. 일본 역시 메이저 항공기 제작사들의 부품 공급선으로 자리를 굳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최근 기류가 바뀌고 있다. 일본은 물론 중국도 연이어 민간용 중형여객기를 성공적으로 선보였다. 중국의 ARJ 21 여객기는 약 300여대 선주문을 받았다. 일본 미쓰비시가 2015년 선보인 70~90인승 중형 여객기인 MRJ의 사전 예약 대수는 447대에 이른다. 탄소섬유복합소재(CFRP) 가공 기술로 제작돼 연비와 기체 강도가 뛰어난 게 MRJ의 특장점이어서 주문은 더 늘어날 수도 있다고 한다. 가와사키 중공업은 4발 제트엔진이 달린 P-1 해상초계기를 개발, 대잠초계기의 원조 국가인 영국은 물론 유럽 각국에 수출을 타진하고 있다.

예약이 실제 주문으로 이어지면 중국과 일본 두 나라가 잇따라 선보인 중형여객기들은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둘 것으로 보인다. 일본 미쓰비시사는 앞으로 20년간 객석 100석 이하의 중형 여객기 신규 및 교체 수요가 누계 5,000여대에 달할 것으로 보고 절반 이상의 수주를 따낸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를 휩쓴 일본제 자동차의 신화가 중형 여객기 부문에서도 재현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주변국이 펄펄 나는데 한국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중형여객기 분야에 대한 미래 구상은 아예 없다. 1990년대 중반부터 추진된 ‘한중 중형 여객기 공동개발’이 무산된 이래, 말만 무성하다. 역대 정권은 출범 초부터 ‘항공 우주 산업을 10년 뒤 먹거리로 만든다’는 거창한 계획만 내놓고 어느 것 하나 실행하지 않았다. 중장기 산업육성정책보다는 항공산업을 정권의 치적 홍보에 악용한 사례는 전두환 정권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공호(미국제 F-5E/F 전투기) 68대 조립생산을 시작한 1982년9월 대통령이 직접 나서 ‘최신예기를 생산해 항공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고 선언했으나 과대포장도 그만한 과대포장이 없었다. 정부는 ‘아시아에서 일본과 중공에 이어 세번째로 전투기를 생산하는 나라가 됐다’고 떠벌렸으나 거짓말이었다. 대만은 한국보다 8년 이른 1974년부터 이 기종을 300대 가까이 조립 및 면허생산 해왔다.

국민의 눈과 귀를 속이는 행태는 옛 이야기일까. 요즘은 나아졌으리라 믿고 싶지만 중형여객기에 관한 작금의 현실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 우리가 국내용 자화자찬에 머물 때 주변국은 저 멀리 뛰어 나갔다.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국내 항공산업의 부진을 말하면 예산 부족을 탓하지만 중국이 ARJ 21 여객기 개발에 투입한 예산이 50억 위안(약 6,100억원). 미국 록히드마틴사는 10억달러(1조2,000억원)로 음속의 6배(마하6) 짜리 극초음속 전투기를 개발할 계획이다. 한국이 30조원을 퍼부어 맑은 강물을 녹조로 만드는 틈에 세계는 하늘로 하늘로 날고 있는 형국이다. 2023년까지 7,246억달러(845조6,000억원) 규모로 성장할 세계 항공산업에 한국이 낄 자리가 남아 있을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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