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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는 누구?] 티베트의 종교·정치적 지도자...망명정부 이끌며 비폭력 독립운동

1989년 노벨평화상 수상도

지난달 30일 인도 다람살라의 ‘달라이 라마궁’에서 만난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다람살라=공동취재단지난달 30일 인도 다람살라의 ‘달라이 라마궁’에서 만난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다람살라=공동취재단


“내가 입는 옷은 2,600년 전 부처가 입은 옷입니다.”

환생한 부처로 여겨지는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종교적·정치적 지도자이다. 따지자면 70회가량 환생한 것이지만 현재의 달라이 라마 체제는 지난 1642년을 기점으로 약 400년의 역사를 갖는다. 달라이는 큰 바다, 라마는 스승을 뜻하는 말로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불교(라마교)의 대표 종파인 거루파의 수장이자 법왕으로서 실질적으로 티베트를 통치한다.

1935년 7월6일 티베트 아무드 지방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처음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은 라모 톤둡이다. 그가 태어난 외양간 너머로 무지개가 걸렸고 특이하게 눈을 뜨고 나왔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는 채 2세가 되기 전 새로운 달라이라마를 찾기 위한 사절단을 만나 환생자로 인정받았다. 달라이 라마는 자신이 열반하기 전에 환생할 곳을 암시하거나 신탁에 의해 뒤이어 환생할 달라이 라마에 대해 예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승들은 이 내용을 토대로 후대 달라이 라마가 될 아이를 찾는다. 지목된 아이는 뒤섞인 물건들 중에서 전(前) 달라이 라마가 사용하던 염주와 유품들을 골라내는 시험을 치르며 티베트의 수도 라싸의 조캉사원에서 열리는 의식을 통해 최종 결정된다.


새 달라이 라마로 지목된 아이는 티베트의 수도 라싸의 포탈라 궁으로 옮겨가 지혜의 바다라는 뜻의 ‘텐진 가쵸’라는 이름을 부여 받았다. 그 이후 5세이던 1940년 즉위식과 함께 공식취임했다. 그러나 1949년 건국한 중국이 이듬해 티베트를 침공했다. 결국 1951년 달라이 라마는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중국이 내민 ‘티베트 평화 해방의 방법에 관한 협의’에 승인했다.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가 된 것. 중국 정부는 ‘하나의 중국’을 명분으로 티베트 문화를 말살하려 했지만 신앙심으로 다져진 티베트의 독특한 문화와 정신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이후 1959년 중국 사령부가 달라이 라마를 경호원이나 각료 동행 없이 베이징으로 초청한 사실이 알려졌고 이를 납치계획으로 판단한 국민들이 티베트 곳곳에서 독립요구와 함께 봉기를 일으켰다. 중국 공산당의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사상자가 대규모로 생겨나자 이를 보다 못한 달라이 라마는 그해 3월 소를 타고 국경을 건너 인도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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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의 망명은 고향을 떠나는 슬픈 선택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그는 티베트뿐 아니라 세계의 지도자로 발돋움했다. 그가 세운 인도 다람살라의 망명정부는 티베트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됐고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난민의 희망이 됐다. 그는 티베트의 외교·군사적 독립을 요구하는 강경 입장 대신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는 중도노선을 취했다. 비폭력 평화정신을 구현했기에 1989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56세가 되던 2001년에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초대 총리를 뽑고 자신은 일선에서 퇴진할 것임을 밝혀 그해 8월 삼동 린포체가 첫 직선 총리로 선출됐다. 이후 2011년에는 로브상 상계 총리가 뒤를 이었다.

달라이 라마가 떠난 티베트 지역은 1965년 중국의 ‘시짱 자치구’로 편입됐다. 수도 라싸의 포탈라 궁은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주인인 달라이 라마를 기다리며 지금은 관광객과 내세를 비는 외지인만 드나들고 있다. /다람살라=박성규기자 exculpate2@sedaily.com

조상인·박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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