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베이컨, 제임스타운을 불태우다





1676년9월19일, 버지니아 식민지의 수도 제임스타운이 불탔다. 나다니엘 베이컨(Nathaniel Bacon·당시 29세)이 이끄는 개척민의 무장봉기 때문이다. 제임스타운이 소실됐다는 소식은 아메리카 식민지와 본국인 영국에 충격을 안겼다. ‘번영하는 뉴잉글랜드의 상징인 제임스타운이 반란으로 불타다니!’


제임스타운은 어떤 곳인가. 건설이 시작된 시기가 1607년. 북미 대륙 최초의 영국 식민지였다. 물론 이전에도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총애를 받던 월터 롤리경이 1587년 로어노크 섬(Roanoke Island·오늘날 노스 캐롤라아니주 인근 섬)에 여자 17명을 포함한 150여명의 정착민을 내려놓은 게 최초. 그러나 4년 후 영국 배가 다시 찾았을 때는 주민은 물론 거주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잃어버린 식민지’로만 기억된 로어노크섬을 제치고 최초의 영국 식민지가 된 제임스타운은 초기의 어려움을 딛고 성장 가도를 달렸다. 담배 덕분이다. 원주민(인디언)들에게 연초 말리는 기술을 전수받은 버지니아 식민지는 1638년부터는 매년 담배 136만㎏ 이상을 영국에 팔았다. 북미 대륙 최초의 경제 호황을 맞은 버지니아에는 사람과 돈이 몰렸다.

버지니아는 대의정치의 씨앗도 처음 뿌렸다. 1619년부터 시작된 ‘버지니아 의회(Virginia House of Burgesses)’는 축소판 웨스트민스터(영국 의회)이자 미주 대륙 최초의 민주주의 기구로 손꼽힌다. 조지 워싱턴부터 존 타일러까지 초기 10명의 미국 대통령 가운데 6명이 버지니아주 출신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미국인들이 공식적인 선조로 여기는 ‘메이플라워호’의 도착(1620) 전에 자치 의회를 구성했던 버지니아 식민지의 수도인 제임스타운이 불탔으니 충격이 컸다.

나다니엘 베이컨은 왜 제임스타운에 불을 놓았을까. 34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해석이 분분하다. 오래된 사건인데도 학자마다 다른 견해를 내놓는 이유는 ‘베이컨의 난(Bacon‘s Rebellion)’이 갖는 시간적 상징성에 있다. 사건의 발생연도가 정확하게 미국 독립선언 100년 전이라서 그런지 긍정적 평가가 많다. ‘미국 혁명에 한 세기 앞서 발생한 선구적 사건’, ‘식민지인의 자유와 권익을 옹호한 영웅, 베이컨’….

과연 그럴까. 베이컨의 난은 ‘억압받던 자영농들의 부패한 식민지 총독에 대한 정당한 항거’였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그렇지 않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자. 나다니엘 베이컨은 문제적 인물이었다. 우선 집안이 좋았다. 영국 경험주의 철학의 선구자 프란시스 베이컨과도 친척이었고 부유한 상인이자 대지주인 토마스 베이컨 부부 사이에서 1647년 태어났다.

키 크고 좋은 인물에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법률까지 공부한 나다니엘은 기대를 모았지만 흠이 있었다. 아집이 강하고 욕심이 컸다. 아메리카 식민지에 오게 된 연유도 송사 때문. 결혼을 반대한 장인을 속여 유산을 가로채려다 발각되자 대서양을 건넜다. 미지의 땅이었으나 그에게는 두 가지 힘이 있었다. 돈과 인맥. 도착(1675년)하자마자 그는 거대한 농장 두 곳을 사들였다. 돈은 얼마든지 있었다. 부모들이 내준 돈이 1,800파운드(노동력 가치 기준으로는 요즘 원화 53억원 상당, 경제성장률을 감안한 가치는 약 870억원)나 있었으니까. 버지니아 전체의 담배세 합계가 400파운드이던 시절, 그는 거부였다.

버지니아 총독 버클리(Sir William Berkeley·당시 70세)도 그를 반겼다. 버클리 총독의 사촌매제였던 베이컨은 총독이 지명하는 버지니아주 상원의원 자리를 바로 꿰찼다. 친인척을 중용하는 버클리 총독에게는 누구 하나 항변할 사람이 없었다. 버지니아 인구가 6,000명에서 4만명 이상으로 늘어나는 25년 동안 총독으로 군림한데다 열렬한 왕당파였으니. 왕정 복고로 등극한 찰스 2세 치하에서 버클리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철옹성 같았던 버클리 총독의 권력은 두 가지 때문에 무너졌다. 첫째는 경제난, 둘째 이유는 사촌 매제인 나다니엘이 주도한 베이컨의 반란. 경제부터 살펴보자. 무엇보다 담배 가격이 떨어졌다. 너나 없이 경작 면적을 늘려 공급이 많아진 탓이다. 매릴랜드와 캐롤라이나 식민지도 담배 뿐 아니라 각종 물품의 대영 수출을 늘려 무역수지 흑자 구조도 무너졌다.

반면 세금은 크게 올랐다. 모국인 영국인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이는 통에 세금이 25%까지 올랐다. 더욱이 세금을 담배 현물로 받았기에 가격이 떨어진 담배로 세금을 내려니 세 부담이 예전보다 두 배 가량 늘어났다. 버클리 총독이 임명하는 상원의원, 치안판사와 보안관도 인건비를 세금을 통해 거둬가 조세 불만이 쌓일 대로 쌓였다.

여기에 자연재해도 겹쳤다. 1670년대 들어 해일과 홍수, 가뭄, 말라리아로 식민지의 경제난이 심화했다.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이 2만 에이커를 보유한 부자만큼 세금을 낸다’고 투덜거렸다. 유럽에서 식민지로 몰려드는 이주민들은 탈출구로 변경 개척을 요구하고 나섰다. 백인 계약 하인(배삯 없이 대서양을 건넌 후 농장에서 운임만큼 일한 후 독립하는 백인, 계약이 끝나면 일정한 농지를 줬다)에게 내줄 농지를 확보하려면 인디언들을 내쫓고 백인 정착촌을 건설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경제난의 속죄양으로 인디언의 영역을 지목한 셈이다.


총독 버클리는 ‘버지니아 식민지를 넓혀서 경제문제를 풀자’는 청원을 전혀 들어주지 않고 뭉갰다. 겉으로는 인디언과의 평화 조약을 내세웠으나 속셈은 따로 있었다. 다른 어떤 품목보다 고부가가치 무역품이던 모피 거래를 인디언들과 독점하며 쌓아 올린 막대한 부를 포기할 수 없었다. 버지니아의 상원의원·순회판사·보안관 등 주류세력 대부분이 종신 총독이나 마찬가지인 버클리와 이해관계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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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니엘 베이컨은 이 틈새를 파고 들었다. 인디언들과 전쟁을 통해 새로운 땅을 얻으려는 비주류 농장주들을 1667년3월부터 규합한 것. 농장주들은 인디언을 위협하거나 회유해 싼 값에 토지를 사들인 다음 소와 돼지를 키우며 인디언들의 옥수수밭을 파괴하는 방법으로 더 많은 땅을 빼앗아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계약기간이 끝나도 농지를 받지 못할 처지인 계약 하인들과 흑인 노예들도 나다니엘의 세력으로 들어왔다. 결정적으로 이들의 5월 회합에서 나다니엘이 아낌없이 뿌린 럼주가 불만에 찬 사람들을 모았다.

자연스레 지도자로 떠오른 나다니엘은 ‘민회의 결정’에 따라 총독의 승인 없이도 인디언들과 전쟁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며 변경 인디언 공격에 나섰다. 총독과 충성파들은 나다니엘의 행동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변경농장주들에 대한 설득에 나섰다. 나다니엘이 모피무역권을 연장받지 못한 불만으로 반란을 선동하고 우호적 인디언들이 보유한 1,000파운드 가량의 모피를 빼앗기 위해 전쟁을 획책한다고 설득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위기를 느낀 버클리 총독은 12년간 계속된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의회를 구성했다. 새로 소집된 ‘6월 의회’는 20여개 항의 각종 개혁조치를 의결했다. 자유민의 선거권을 확대하고 총독 측근들이 각종 공직에 진출할 길을 제한하며 납세 제도를 완화하는 방안과 카운티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방안을 담았다. 인디언들과 전쟁 확대도 의결했다. 나다니엘이 체포를 피해 변경으로 피신했던 사이에 진행된 ‘6월 의회’는 개혁 조치를 의결하면서도 영국 국왕 찰스 2세에게 버클리 총독을 유임시켜 달라는 청원을 올렸다.

일종의 유화책을 쓴 버클리 총독과 충성파는 끝까지 양보 못할 사안이 하나 있었다. 나다니엘을 버지니아 민병대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라는 요구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베이컨을 총독의 승인 없이 인디언과 전쟁할 수 있는 사령관으로 임명하면 전쟁이 불 보듯 뻔하고 자신들의 모피 독점 무역권도 사라질 상황. ‘군 사령관 나다니엘’에 대한 총독의 거부권 행사는 버지니아를 내전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버클리 총독은 나다니엘과 전쟁을 위해 민병대 1,200명을 소집했으나 오히려 곤경에 빠졌다. 민병대는 인디언과 전쟁을 요구하며 거꾸로 나다니엘 편을 들었다. 총독은 강 건너 편으로 도망하고 제임스타운에 진주한 나다니엘 군대는 충성파의 재산을 몰수하고 불을 질렀다. 영국이 개척한 첫 식민도시이자 버지니아의 수도인 제임스타운은 이렇게 소실돼 미국 정부가 1936년 식민시대 역사공원으로 지정해 복원하기까지 폐허로 남아 있었다.

나다니엘 베이컨의 반란은 원인과 경과가 복잡했지만 결말은 싱겁게 끝났다. 1767년 10월 말 나다니엘이 29세로 병사하면서 세력이 약해진 반란군은 영국이 급파한 상선대와 1,130명 군 병력에 의해 진압 당했다. 힘을 되찾은 버클리 총독은 반란 주동자 23명을 교수형틀에 매달았다. 변경의 농장주들은 일찌감치 총독에게 굴복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증조부가 진압군으로 참전한 이 반란의 막판까지 항거한 사람들은 흑인 노예 80여명과 20여명의 백인 계약 하인들이었다.

반란을 진압한 버클리 총독은 6월 의회에서 입법한 20여개의 개혁 입법을 모두 백지로 돌렸으나 그의 권력도 종말을 맞았다. 영국 본국에서 나온 조사위원회는 ‘개혁 입법의 타당성이 있으며 총독 일파의 부패가 인정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결국 버클리 총독은 본국으로 소환되고 말았다.

아메리카 식민지 최초의 봉기인 ‘베이컨의 반란’이 발생한 표면적인 이유는 총독부의 인디언 정책에 따른 불만이었으나 내용은 ‘쩐(錢)의 전쟁’이었다. 유한한 땅을 놓고 갈등했던 신구 지주 계층은 출신 성분과 성향이 같았다. 총독과 충성파, 베이컨과 변경 농장주들은 모두 지주였다. 총독 일파의 평균 나이가 41세, 평균 3,300에이커의 토지를 중심지에 보유한 반면 변경 농장주들의 나이는 평균 30세, 보유 토지는 1,800에이커 정도였다. 베이컨의 반란은 독점권을 지닌 장년 기득권 층에 대한 청년층의 도전이었던 셈이다.

버클리 총독과 그 사촌매제인 나다니엘, 두 고집쟁이가 제한된 물적 재화를 놓고 싸웠던 베이컨의 반란은 다소 싱거운 결말을 냈지만 미국은 물론 인류의 역사에 인종 말살과 차별 심화라는 큰 상처를 남겼다. 아메리카 원주민, 즉 인디언들도 베이컨의 난 이후 더욱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하층 백인의 토지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인디언 말살 정책이 보다 적극적으로 펼쳐졌다.

누구보다 피해 본 계층은 흑인. 하층 백인과 흑인들이 결합하면 강력한 적이 될 수 있다는 학습 효과는 버지니아 의회의 ‘흑백 결혼 금지법’(1691) 제정으로 이어졌다. 법을 어기거나 이미 결혼한 흑백 부부에게는 추방령을 내렸다. 인간끼리의 결합을 막은 이 법은 1967년 연방대법원에 의해 위헌 판결을 받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차별의 고통으로 몰아 넣었다.

법으로 금지된 흑백차별은 사라졌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흑인의 피가 1%라도 섞였으면 유색인으로 분류하는 ‘한 방울 법칙(one rule)의 사회적 생명력은 여전하다. 베이컨의 반란은 백인 부자들끼리의 재산 다툼이 인종 간 증오와 차별을 낳는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한국 사회 내부에는 차별이 없을까. 외국 이주 노동자, 다문화가정과 그 아이들에게 대한 편견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굳이 혈연을 따질 것도 없다. 고질적인 학연과 지연, 혈연의 폐해는 날이 갈수록 더해간다. 젊은이들끼리 차별이 기성 세대보다 더 심해질 조짐까지 보인다니 걱정이다. 베이컨의 난에서 보듯이 차별과 편향적 이익구조는 언젠가는 곪아 터지게 마련이니.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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