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이사회 당시부터 금융당국에서 한진그룹에 대한 여신을 확인한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건전성 확인 차원이라고 하지만 회사에서는 압력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가 아니면 (한진해운 지원에 관한 내용은) 애초에 이사회 안건으로 올라올 수도 없는 일입니다.”
6명의 대한항공 사외이사들은 답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실제 금융당국은 최근 대한항공을 비롯한 한진그룹 계열사에 대한 여신 현황 파악에 나섰다. 한진그룹 전체 여신 4조5,000억원 가운데 대한항공 여신규모만 4조원에 육박하는 상황이다. 이를 회수할 경우 회사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다.
이처럼 정부가 연이어 한진그룹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네 차례 열린 긴급이사회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반대’ 표를 행사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특별법 제정 등의 방법으로 자금지원의 길을 열어달라”는 초법적인 발상까지 내놓고 있지만 대한항공 사외이사들은 “여론에 휩쓸려 위법행위를 할 수 없다”며 완강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18일까지 대한항공은 총 4번의 긴급 이사회를 소집했다. 하지만 세 번째 이사회에서 “한진해운이 보유하고 있는 롱비치터미널 등 해외터미널 지분과 한진해운이 자회사 TTI(롱비치터미널 운영회사)에 빌려준 대여금(채권)을 담보로 우선 확보한 후 대한항공이 자체 보유하고 있는 자금 600억원을 활용해 지원하겠다”는 내용의 안건을 의결한 것이 전부다. 이마저도 현실상 장벽에 막혀 있다.
대한항공 이사회는 사내이사 4명과 사외이사 6명 등 총 10명으로 꾸려진다. 앞선 이사회 안건이 부결되고 의견을 모으지 못하는 것은 사외이사 6명이 모두 반대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외이사 A씨는 “결론을 못 내고 있는 것이 이미 결론이 난 것”이라고 했다. 법적으로 명확한 답이 나와 있다는 얘기다. 그는 “오너의 독단적인 전횡을 막고 주주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사외이사들이 존재하는 것”이라며 “사내이사 입장에서는 말을 뱉어놓았으니 해결하고 싶겠지만 법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업계에서는 “배임행위를 피해 법을 지키려다 지친 사외이사들이 집단 사퇴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차라리 전직 관료들을 새로 사외이사로 영입해 지원건을 처리하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그만큼 정부와 사내이사들의 압박이 심한 상황이다.
사외이사들은 법정관리에 돌입한 만큼 한진해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있다. 매출채권을 담보로 대한항공이 자금을 지원할 것이 아니라 매출채권을 회수하고 빨리 배를 팔아 현금으로 하역자금에 투입해야 한다는 것.
한 사외이사는 “한진해운의 물류대란은 안타깝지만 많은 외국인 투자가들이 이번 상황을 지켜보고 있고 법대로 움직이는지 보고 있다”며 “그룹 내 회사들이 상호 빚보증을 서는 것은 20년 전 일”이라고 일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