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때 장성한 손주 28명에게 둘러싸인 할아버지가 있다. 복 받은 노인의 이름은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Mayer Amschel Rothschild). 19세기 초반부터 1차대전 시작 직전까지 약 100년간 세계를 쥐락펴락한 ‘로스차일드 금융 가문’을 연 사람이다. 포브스(Forbes)지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비즈니스맨 20인’을 발표할 때 7위에 꼽힌 그는 손주들을 보면서 내심 서운했을지도 모른다. 손주들 모두가 부부 관계가 아니라서.
손자와 손녀가 부부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마이어가 부인 쿠틀레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22년 동안 모두 16명. 여기서 아들 다섯과 딸 다섯이 살아 남아 건강하게 자랐다. 다섯 아들이 낳은 손주 가운데 결혼한 사람은 14쌍 28명. 이 중에 10쌍 20명은 사촌끼리 결혼이었다. 단지 4명만 사촌 대신 가문 바깥에서 배우자를 골랐다. 물론 마이어 암셸이 생전에 모든 손주들의 결혼을 지켜본 것은 아니지만 죽기 전부터 그는 손자와 손녀 간 근친혼을 적극 권했다.
왜 그랬을까. 가문의 결속을 다지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딸들을 보호한다는 심산도 없지 않았다. 재산을 노리거나 종교가 다르고, 상업을 잘 모르는 남자에게 딸들을 보내 위험을 감수하느니 사촌끼리 결혼시킨 것이다. 마이어의 아들들은 혼사 때마다 거액의 지참금을 딸려 보냈다. 로스차일드 근친혼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리 지참금을 많이 줘도 어차피 집안 돈이니까.
돈이 얼마나 많았길래 극단적인 근친혼으로 재산을 지키려 들었을까. 셈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로스차일드 런던 지사의 식객이던 독일 귀족 출신 여행작가 헤르만 폰 퓌클러 무카우스 공이 남긴 말. ‘나폴레옹은 아작시오(코르시카섬의 항구도시)에서 태어나 지구 상의 모든 왕좌를 뒤흔들었다. 로스차일드도, 그의 아버지는 잡화점 상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유럽의 어느 군주도 로스차일드 없이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기억이 생생하던 19세기 초반, 특정인의 업적을 나폴레옹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최상급 찬사였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런 말도 나왔다. ‘고대에 유대인들은 한 임금을 섬겼다. 오늘날에는 유럽 열강의 황제와 국왕들이 한 유대인을 우러러 본다.’ 한 유대인이란 두 말할 것도 없이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프랑스 혁명의 평등과 박애 정신 덕분에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풀리고 있다지만 멸시 어린 시선이 여전하던 시대에 유대 가문 로스차일드의 발흥에는 극적인 요소가 가득하다. 독일인 여행작가의 말처럼 로스차일드 가문의 시작은 미미하고 초라했다. 마이어 암셸이 살았던 시간과 공간은 더욱 그랬다. 프랑크푸르트. 유럽의 대표적 자유상업도시였건만 차별은 어느 곳보다 악독하고 질겼다. 영국 작가 데릭 윌슨의 ‘유대 최강 상술 로스차일드(원제 Rothschild-A Story of Wealth and Power)’를 따라가 보자.
‘1944년 3월 연합국의 폭격으로 그곳(프랑크푸르트 구시가지)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중략)…시대와 더불어 사라진 것 가운데, 구 시가지 입구 브뤼켄문의 장식화가 있다. 그 그림에는 돼지 등에 올라탄 한 랍비가 돼지 꼬리를 들어 올리고, 다른 랍비가 돼지 똥을 받아 먹는 것을 악마가 지켜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아래에서는 유대인 아기가 돼지 젖을 빨고 있다. 이 그림의 메시지는 유대인과 돼지는 시내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한 것은 1460년. 신교 측이 자비를 베풀어 유대인 11가족의 이주를 허용한 게 시초다. 시간이 흐르며 자비는 편견과 차별로 바뀌었다. 1702년에는 ‘그리스도교도 집이 유대인에게 들여다 보이지 않도록 유대인 창문은 벽 속에 파묻으라’는 ‘유대인 주택법’까지 나왔다. 마이어 암셸이 태어난 1744년께는 3,000명의 유대인들이 200채 집에 갇혀 살았다. 부모의 희망대로 유대교 신학교에 다니던 마이어는 11살 때 인생 첫 시련을 겪었다. 프랑크푸르트를 휩쓴 천연두로 양친을 잃고 학업을 포기, 누이와 아우 넷의 생계를 위해 유대인 금융업자 오펜하임 상회의 견습 점원으로 들어가 6년간 금융 실무를 익혔다.
마이어가 주목한 것은 금융보다 골동품과 고화폐. 당시 독일 지역은 크고 작은 235개 공작령, 백작령에 51개 도시가 저마다 독립국인양 독자적인 화폐를 발행하던 상황. 수 많은 귀족과 부호 사이에서 예술 작품과 골동품 수집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였다. 마이어는 자신보다 한 살 위인 하나우공 빌헬름의 눈에 들려고 애썼다. 잡화점 겸 고화폐점을 운영하며 부자들과 안면을 넓혀 나가던 그는 25살 때 기회를 얻었다. 진귀한 고화폐를 바친 끝에 빌헬름 백작가문의 어용상인(Court Factor)으로 지정된 것이다.
1769년9월21일, 신이 난 마이어는 간판을 달았다. 간판에는 빌헬름 공의 집안인 헤센 하나우 가문의 문장(紋章)과 금 글씨가 적혀 있었다. ‘M.A.로트 실트를 하나우공 빌헬름 전하 궁정 어용상인으로 임명함.’ 초라한 유대인 거리는 흥분에 젖었다. 딸을 내주기 꺼리던 예비장인은 바로 결혼을 승락했다. 마이어는 이때부터 날개를 달았다. 사업도 풀리고 사업 환경도 좋아졌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가 관대한 명령을 내린 덕분이다. 유대인의 게토 밖 거주를 허용하고 구별된 의복 착용과 인두세를 폐지하며 교육까지 장려한 것이다. 유대인 남자도 병역 의무를 치를 수 있도록 시민증을 받았다.
마이어는 얼마 안지나 빌헬름공의 궁정 어용 은행가 자리까지 따냈다. 빌헬름은 당시 작은 나라의 영주였으나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갑부였다. 돈벌이의 원천은 용병 수출. 빌헬름의 부친 헤센 카셀 백작 프리드리히 2세는 영국왕 조지 2세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인 이후 사위로서 영국에 대한 용병 수출에 열을 올렸다. 인구의 7%를 군 병력으로 유지하며 미국 독립전쟁에 1만3,000명의 병력을 영국에 보냈다. 모든 게 돈이었고 마이어는 영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용병 급료의 환전과 약속어음 처리를 맡으며 재산을 불렸다. 1799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황실 어용상인’ 지정도 받았다. 국제적으로도 이름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결정적인 계기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찾아왔다. 나폴레옹은 헨센 카셀공 빌헬름 백작을 경멸해 모든 재산을 빼앗으려 들었다. 프랑스군의 진격에 빌헬름공은 도주한 채 모든 재산을 마이어에게 맡겨 놓은 상황. 프랑스군이 상회와 집에 들이닥쳤을 때 마이어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압수 당하면서도 빌헬름 백작의 재산만큼은 꽁꽁 숨겼다. 빈털터리가 된 그는 프랑스군이 철수하고 빌헬름 백작이 되돌아 왔을 때 맡긴 재산에 이자까지 쳐서 바쳤다.
빌헬름 백작은 이렇게 답했다. “재산을 모두 잃어가면서도 그대가 정직하게 얹어주는 이자는 물론 원금도 받지 않겠다. 이자 따위는 자네가 내 재산을 지키려 잃은 것에 비하면 하찮겠지. 내 재산은 앞으로 20년간 연 2% 이하의 이자로 자네에게 맡기겠다.‘
정직과 신용이 만들어 준 기회를 마이어는 교묘하게 활용했다. 벨헬름 백작이 믿고 맡긴 돈을 누구도 모르는 국제 네트워크를 가동, 불렸다. 국제 네크워크란 다섯 명의 아들.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본부 삼아 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순으로 지점망을 넓혀 돈이 되는 곳에 빌헬름의 자금을 뿌렸다. 가장 크게 두각을 나타낸 아들은 3남 네이선 로스차일드. 맨체스터에서 직물업으로 시작해 런던으로 이주해 국채와 공채, 주식까지 손댔다. 비밀 사업도 있었다. 밀수. 대륙 봉쇄령을 뚫은 밀수는 황금알을 낳은 장사였다.
나폴레옹과 싸우던 영국 정부는 네이선의 정보망과 밀수 통로를 제대로 써먹었다. 러시아 전선으로 떠난 나폴레옹을 뒤에서 괴롭히는 웰링턴 장군에게 군자금을 보내는 임무를 도맡았다. 영국 정부가 자금이 딸릴 때는 집안의 돈으로 메꾼 로스차일드가는 대담하고 기묘한 방법으로 대륙봉쇄령을 뚫었다. 스페인 전선의 웰링턴 장군에게 보내는 군자금을 당당하게 파리의 은행을 이용해 결제한 적도 있다.
가장 극적이고 논란인 대목은 1865년 6월 워털루 전투의 정보를 미리 알아내 상상할 수도 없는 거액을 챙겼다는 일화. 런던 로스차일드는 유럽의 미래를 좌우할 워털루 전투의 결과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챘다. 쾌속 범선과 파발마, 전서구(비둘기), 이시디어(동부 유럽 히브리 방언) 암호문을 이용한 특유의 정보망 덕분이다. 런던 로스차일드의 네이선은 최소한 영국 정부보다 이틀 빨리 영국군이 승리했다는 정보를 잡았다. 여기까지는 모두의 해석이 일치한다.
논란은 네이선이 일부러 ‘패배’를 인지한 듯 투매해, 대폭락 장세를 조성하고는 뒤로 사들여 2억3,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거액을 챙겼다는 것. 임금 상승률 기준으로 보면 요즘 원화 가치로 245조원이 넘는 돈이다. 반론도 있다. 런던 로스차일드가 정보를 미리 알고 영국 정부에 제공한 것까지는 사실이지만 채권 투매는 없었다는 것. 대신 전쟁이 오래 갈 것으로 예상하고 금을 미리 사두었던 로스차일드가 금을 팔고 공채를 매입해 돈을 챙겼다는 것이다.
둘 다 부정하는 시각도 있다. 런던에서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한 유대 가문 로스차일드가 영국의 미래가 달린 워털루 전투의 정보를 치부에 이용했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유대인을 극도로 증오한 히틀러 치하의 나치가 퍼트린 로스차일드 거액 차액설이 음모론과 겹쳐 퍼졌다는 주장이 상존한다. 음모론에는 러시아 혁명과 세계 대공황, 중동의 분할, 석유 파동도 로스차일드가 결정했다는 설까지 있다. 심지어 로스차일드의 재산이 5경원이 넘는다는 주장도 끊임없이 고개를 든다.
포브스지가 평가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은 약 15억 달러. 음모론에 비하면 턱 없는 금액이고 실제보다 저평가됐다는 게 중론이지만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로부터 8대가 이어지는 가운데 그 정도만이라도 유지했다면, 그 것만으로도 대단한 기록이다.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을 잊지 않고 이스라엘 건국까지 지원하고, 로스차일드의 지점이 소속된 나라에 충성을 다한 덕분이다. 프로이센과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가 50억 프랑 전쟁 배상금을 마련할 수 없을 때 파리 로스차일드가 앞장 서서 자금을 마련한 기록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1·2차 세계대전에서도 연합국 각국의 군대에 자식들을 입대시켰다. 오늘날 로스차일드는 금융 뿐 아니라 광산과 포도주, 관광산업 등에도 흔적이 남아 있다.
인간이 끝없이 진보할 것이라고 믿었던 19세기를 사실상 지배했던 로스차일드. 그들이 20세기와 21세기를 지배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분석가들은 두 가지 이유를 든다. 미국 시장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과 혈연적 한계. 재산을 지키려 손주들끼리 결혼시킨 마이어 암셸의 계산이 더 이상 뛰어난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독식은 위험하다. 언제나.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