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슨 인먼은 그의 책 <석유의 신탁(원제 The Oracle of Oil)>에서, 지질학자 M. 킹 허버트의 이야기를 통해 석유 정점을 지나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석유의 역사를 다룬다. M. 킹 허버트는 석유의 시대가 언젠가는 끝이 날 것임을 최초로 실감한 학자였다. 저자 인먼은 파퓰러사이언스 인터뷰를 통해 기후 변화의 시대에 석유의 미래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본고는 인먼의 책 일부분이다.
마리온 킹 허버트는 이 순간을 위해 수개월동안 준비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성인이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30년을 준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56년 3월 8일 아침 10시. 그는 샌 안토니오 플라자 호텔 꼭대기 층 볼룸의 길고 좁은 홀에 마련된 무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약 500명이나 되는 석유 업계 종사자들이 있었다.
그는 대담한 예측을 할 계획이었다. 그는 여기 모인 청중들에게 미국의 장래에 위기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그런 주장은 그가 미국 석유 자원에 대해 심층 분석을 한 끝에 나온 결과였다. 미국의 석유 생산량, 즉 땅에서 원유를 채굴하는 속도는 무려 100년 동안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허버트의 계산에 따르면 이런 추세도 곧 끝이 날 것이었다. 그는 늦어도 1970년대 초반, 즉 앞으로 10~15년 내에 미국의 석유 생산량이 정점에 달할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전 세계의 석유 생산량 정점은 21세기 초에 올 것으로 보았다. 그의 예측데로 라면 이 정점을 지난 후에는 해가 갈수록 석유 생산량이 줄어들지만 이 정점이 석유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석유가 풍족한 시대에서 석유가 부족한 시대로의 중대한 반환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가 준비된 연단으로 걸어 나가 연설을 시작하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에게 손짓으로 일어나서 방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그가 속해 있는 쉘 석유회사 뉴욕 지사의 홍보 보좌관이었다. 그는 급히 방 밖으로 나갔다. 보좌관에 따르면 쉘 석유회사 본사에서는 이번 강연의 메시지를 바꾸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보좌관은 “논조를 조금만 낮추어 주시면 안 되나요? 너무 선정적인 부분은 좀 빼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부탁했다.
허버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선정적인 부분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정직한 분석에 의한 결과입니다.”
“10~15년 후에 석유 생산이 정점에 달할 거라는 주장은 너무나 과장된 표현입니다.”
석유는 현대 사회와 무척이나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때문에 현대인들이 무척이나 석유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란 쉽지 않다. 보통은 예측 가능한 미래에도 석유가 풍족할 거라고 가정하고 지낸다. 이러한 전제 하에 도시를 기획하고, 심지어는 도시의 무계획적인 팽창을 방관하기도 한다. 석유는 매일의 출퇴근길 뿐 아니라 무역에도 쓰인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물건들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석유 덕택이다. 2015년 한 해 동안 미국인들이 소비한 석유는 약 70억 배럴. 하루에 2천만 배럴씩 소비한 셈이다. 미국인 1인이 하루에 9.5리터의 석유를 쓰는 셈이다.
인간이 석유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지는 150년이 넘었다. 1859년에 펜실베이니아의 유전에서 석유가 터져 나오면서 석유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지난 50년간, 석유는 명실 공히 세계 최고의 연료였다. 석탄, 천연가스, 그 밖의 다른 어떤 대체에너지보다도 더 탐욕스럽게 소비되었다. 전 세계에서 제일 많이 소비된 석유는 흔히 ‘원유’라고 불리 우는 물질이었다. 원유는 땅에 구멍을 파서 펌프로 끌어올려 얻는다. 그러나 2006년부터 현재까지 10년간 원유의 생산량은 일일 7천만 배럴 선에서 거의 늘어나지 않고 있다. 그동안 유가가 급등했음에도 말이다. 때문에 현 국제 에너지 기구의 사무총장 파티 비롤은 이렇게 말한다.
“값싼 석유의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2006년부터의 세계 석유 증산은 온전히 원유가 아닌, 비전통적인 출처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비전통적인 출처 중 제일 오래된 것은 액화석탄이다. 액화석탄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사용했으며 현재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 또 다른 비전통적인 출처로 역청사암(Tar Sands)도 개발되었다. 캐나다를 중심으로 채굴되는 역청사암은 최근 일일 채굴량이 200만 배럴을 넘었다. 바이오연료 생산량도 일일 100만 배럴이 넘는다. 바이오연료는 옥수수로 생산한 에탄올, 콩으로 생산한 디젤 연료 등이 대표적이다.
가장 최근에 개발된 비전통적 석유 공급원은 혈암유다. 혈암유는 수압파쇄법으로 얻는다. 수압파쇄법의 역사는 수십 년에 달한다. 우연히도 허버트 역시 지난 1950년대에 수압파쇄법의 원리를 정확히 설명한 최초의 인물들 중 한 사람이었다. 수압파쇄법은 최근 크게 확산되고 있다. 수평 시추 기법의 발전과 발맞추어, 수압파쇄법은 미국 내에서만 수만 개의 유정을 파는 데 사용되었다. 수압파쇄법으로 인한 혈암유 획득은 불과 5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미국의 일일 석유 생산량을 400만 배럴 이상이나 높여 놓았다. 수십 년째 줄어들던 일일 석유 생산량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이러한 반전은 매우 극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생산량 증가를 <혈암 혁명>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2010년부터 투자자들은 비전통적 석유 생산법 개발에 수천 억 달러를 투자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체물들을 모두 합쳐도 오늘날 전 세계 석유 총 생산량의 일부에 불과하다. 전 세계 석유 총 생산량의 절대 대부분은 여전히 원유다. 원유 생산량을 어떻게든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산량은 서서히 줄어들고 있는데도 말이다.
지난 여러 해 동안 세계 경제는 순탄치 않은 여정을 걸어왔다. 오랫동안 유가가 고공 행진을 한 끝에 2008년에 글로벌 경제 위기가 왔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온 최악의 경제적 재난이었다. 2014년에 유가가 폭락한 주원인도 알고 보면 허약해진 세계 경제가 주원인이었다. 고전하는 세계 경제, 그리고 널뛰는 유가는 세계적인 석유 정점이 가까웠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석유 생산을 크게 늘려 감당할 수 있는 가격으로 공급할 수 없는 시점 말이다.
M. 킹 로버트는 석유관련 일을 시작할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석유 생산의 한계를 예측하려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전 세계에 이러한 한계를 알리려 했고, 지속 가능한 미래로 가는 길을 찾으려 했다.
오늘날 전문가들은 허버트의 예측이 옳은가 그른가를 놓고 여전히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는 쉽게 결론을 지을 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허버트가 말했던 것들, 그리고 말하지 않았던 것까지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허버트의 반대자들과 지지자들이 덧붙여 놓은 틀린 이야기들을 걸러내 버려야 한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간다면, 어떤 예측이 옳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따져봐야 한다. 누가 봐도 당선될 사람이 분명 할 때, 선거 결과를 예측하기는 쉽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연료의 장기적 전망을 예측하는 것은 훨씬 복잡한 일이다. 어떤 예측이 옳거나 최소한 유용하려면 모든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다 맞춰야 하는가? 그 정도로 자세한 예측이면 충분한 걸까?
허버트는 예측의 속성을 이야기할 때, 기원전 6세기 리디아 왕국(오늘날의 터키)의 왕이었던 크로이소스의 사례를 자주 들었다. 크로이소스는 이웃 나라인 페르시아 제국을 붕괴시키기 위해 전쟁을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었다. 그는 신탁을 얻기 위해 델포이의 아테네 신전에 사자를 보냈다. 신전의 여자 예언자들은 지하실에서 접신을 한 끝에, 크로이소스에게 이런 예언을 들려주었다. “그대가 페르시아와 전쟁을 한다면, 큰 제국이 무너지리라.”
크로이소스는 이것을 자기 나라가 승리한다는 예언으로 알아듣고 전쟁을 벌였다. 그 신탁은 결국 맞기는 맞았다. 그러나 무너진 제국은 페르시아가 아닌, 크로이소스의 나라였다. 허버트는 미래 예측이 이 신탁과도 같은 경우가 무척 많다고 지적한다.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크로이소스 이야기에는 허버트가 말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전쟁에서 진 크로이소스는 엄청나게 괴로워했다. 그래서 그는 신탁대로 따르기 전, 그것이 맞는지 검증해보기로 했다. 그는 오늘날의 그리스, 리비아, 기타 주변국들의 도시에 사자를 보냈다. 그리고 그 곳에 사는 예언자들, 현자들, 점쟁이들에게 특정 일시에 크로이소스가 하는 일을 맞춰 보라고 시켰다. 그 특정 일시에 크로이소스는 구리로 된 냄비 안에 거북이와 양을 넣고 삶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정확히 맞춘 사람은 델포이 신전의 예언자들 뿐 이었다. 이후 크로이소스는 망할 때까지 그 예언자들을 믿었다고 한다.
오늘 우리가 예측자에 대해 갖는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사실 예측이 아니라 신탁을 원하고, 믿을 수 있는 예측을 내놓는 사람을 원한다. 그 예측이 나오는 과정을 이해할 수 없어도 말이다. 크로이소스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좋은 소식인 것 같은 예측을 선호하고,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혹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믿었던 예측가에게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허버트는 나쁜 소식을 전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은퇴할 때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경고를 무시하거나 잊었다. 심지어 그의 예측이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한 시점에, 그의 추종자들조차도 그가 제시한 방법론이나, 그의 경고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추종자들과 반대자들은 그의 예측을 엄밀히 연구하고, 그에 기반을 둔 건설적인 찬반 논의를 발전시키기 보다는, 허버트를 일종의 예언자로 보았다. 예언은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있으며, 예언에 사용된 방법론은 평범한 사람이 감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허버트의 말은 예언도 신탁도 아니다. 그는 과학자다. 예측을 할 때면 언제나 데이터를 보여주고, 논리적인 방법론을 사용하여 누구나 검증할 수 있도록 한다. 그것은 그가 다른 모든 과학 연구에도 사용한 방법이었다. 그로서 그는 <20세기 지질학의 르네상스 맨>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가 사망한 지 몇 년이 지난 1991년, 미국 과학 한림원은 어느 보고서에서 그의 유산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했다.
“이 솔직한 아웃사이더는 한바탕 난리를 피운 끝에 관측적이고 설명적이던 지구 과학을 정량적이고 실험적이며 예측적인 학문으로 이끌었다.”
허버트는 지질학 연구를 통해 확실한 명성을 얻었다. 그럼에도 그의 여러 동료들은 그가 말한 석유의 장래에 대한 예측을 의심하고 있다. 그의 인구 및 경제 성장에 대한 비평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더욱 적다. 허버트는 이러한 회의론에도 불구하고 매우 다른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는 경제가 성장하지 않고, 인구와 자원 소비, 환경의 상태가 적정하고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하는 세계를 꿈꿨다.
허버트는 인류가 현재의 상태를 벗어나 이러한 안정적인 상태로 돌입하려면 지적 혁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인류가 이에 성공한다면 사회는 평등하고 정의로워지며 사람들은 여가와 학습에 삶을 투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는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사회도 경험하지 못한 문화적 르네상스가 될 것이다. 허버트는 석유 예측 때문에 비관주의자라는 꼬리표를 얻었지만, 그는 실제로는 이상주의자였던 셈이다.
서울경제 파퓰러사이언스 편집부/by Mason In-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