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이 일대는 ‘주한미군기지’가 있어 흔히 미군 동네로 불리는 용산구 남영·후암동이다. 서울의 중심부인 용산구는 해방 전후 각각 일본군, 미군 등 외국군이 오랜 기간 차지하고 있었으며, 지금까지도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서울 속 지구촌이다. 왠지 모를 이질감에 어수선한 기운까지 느껴지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맛집 쓰리고’가 이번에 찾은 곳은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 근방에 있는 가장 태국스러운(?) 음식점 ‘창수린’이다.
태국어로 창(Chang)은 ‘코끼리’, 수린(Surin)은 ‘지역’이라는 뜻으로 직역하자면 ‘코끼리 지역’이다. 음식점 이름만 놓고 보자면 ‘대체 이곳이 뭐하는 곳인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실제 태국 현지에서 코끼리는 장수와 행운을 상징, 신성시하고 있으며, 태국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뜻을 알고 보니 이름에서부터 태국 감성(feel)이 충만하게 느껴진다. 태국음식 마니아들 사이에서 ‘태국 시골 진국의 맛’이라는 입소문이 자자한 이유를 알겠다.
태국음식은 흔히 이탈리아, 프랑스, 중국과 함께 세계 4대 음식으로 꼽힌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현지의 맛을 느껴보도록 하자.
One go! 과감하게 씹고!
먹는 행복이 가득한 쿡토피아, 태국
동남아 여행의 가장 큰 묘미는 단연 ‘식도락’이다. ‘달고 짜고 시고 맵고’ 사(4)가지(이것은 싸가지의 오타가 아니다!)를 갖춘 동남아 음식은 도통 수저를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다.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에서 식문화가 인간의 의식주 중 가장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한 가지. ‘날씨’ 덕이다. 우선 의(衣)를 살펴보자, 동남아는 대체로 일년 내내 습하고 더운 날씨 탓에 옷이 가볍고 단출하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와는 달리 계절별로 옷을 바꿔 입을 필요가 없다. 다음으로 주(住). 동남아는 흔히 건기와 우기로 계절이 나뉘는데 눈보다는 비가 많이 오므로 통풍과 습기를 해결할 수 있는 가옥 형식이 발달해 있다. 따라서 추위와 더위를 나는 우리나라에서 단열재 등 인공 건축 소재를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태국은 자연에서 나는 나무를 그대로 쓴 집이 많다. 결국 남은 것은 식문화. 예부터 태국은 비옥한 토지와 넉넉한 물, 뜨거운 태양열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곡창지대로 꼽히며, 열대 과일과 향신료 또한 풍부하다, 특히 동남아 주변국과 달리 식민지배를 받은 적이 없고, 풍부한 식량자원으로 서민의 식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또 수세기에 걸쳐 세계 여러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각지의 다양한 맛이 어우러졌다.
세계인의 미각을 사로잡은 마성의 맛, 태국음식. 과연 창수린에서도 현지의 감동적인 맛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까.
우선, 이 가게에 도착하면 대부분 눈이 휘둥그레진다. 언뜻 외관만 보면 음식점 같지 않은데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어 놀라고 내부에 들어서면 지나치게 작아서 다시 한번 놀란다.
내부 홀은 총 4개의 테이블(총 12석) 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 무리당 대기시간은 평균 20분 정도다. 필자 역시 비가 오는 날임에도 25분 정도 기다렸다. 정말 운이 좋다면 바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3-4팀 이상 대기 중이기 때문에 마음을 비우는 게 속 편하다.
특이한 점은 음식 메뉴판이 떡 하니 가게 앞 유리에 붙어있다는 점. 보통 음식점에선 가격이 적힌 메뉴판을 이렇게 문 앞에 붙여 놓지 않고, 되도록 자리에 착석하면 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이것만 봐도 평소 사람들이 얼마나 기다리는지 짐작할 수 있다. 외국인 손님도 많아서 그런지 메뉴판은 친절하게 영문·한글판 2가지가 나란히 붙어 있다.
Two go! 화끈하게 빨고!
‘이거 맛이 좀..상한 거 아니에요?’
태국 음식하면 절대 빠질 수 없는 요리 바로 똠얌쿵. 똠얌은 ‘맵고 신 국물’이라는 뜻으로, 맵고 짜고 달고 시고 오묘하게 조화로운 국물 맛이 특징인 태국의 전통 수프다. 프랑스의 부야베스, 중국의 샥스핀 수프와 함께 세계 3대 수프로 꼽힐 정도로 위엄있는(?) 수프다. 똠얌에는 대체 뭐가 들어가길래 희한한 맛이 날까. 우선 매운맛을 내는 붉은 고추, 새콤한 맛을 내는 라임, 레몬그라스, 카피르 라임(kaffir lime) 잎, 고량강(高良薑), 고수 잎 등의 향신료가 매운 맛과 톡 쏘는 맛의 주범이다.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이 똠얌꿍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똠얌꿍의 정확한 기원은 자세히 밝혀진 바 없으나 1782년부터 시작된 라타나코신(Ratanakosin, 1782~1868) 왕조 시기에 처음 등장했으며 상인들이 이것 저것 재료를 섞어 먹는데서 탄생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수세기에 걸쳐 주변국과 문화적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혹자는 그 속에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한 걸작이라고도 말한다. 일명 태국의 김치찌개로도 불리는 국민 요리 똠얌쿵은 이후 왕의 식탁에까지 오르며 궁정 대표 음식으로 자리매김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내국인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까지 각광 받는 음식이 되었으며, 실제로 전 세계 타이 음식점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태국 음식 1위로 ‘똠얌쿵’이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 똠얌쿵을 접하는 사람들은 흔히 한 음식에서 같이 느낄 수 없는 맵고 신 맛의 조화로 인해 ‘이거 상한 거 아니야’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다. 냄새마저도 이상한 구린내가 코끝을 자극하기 때문. 물론 처음엔 눈과 입이 놀랄 수 있겠지만, 신기하게도 계속 인내하고 먹다 보면 묘한 중독성이 있다. 여기서 잠깐, 똠얌쿵울 맛있게 먹는 팁을 공유한다. 똠얌쿵을 먹을 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뜨거울 때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뜨거울 때 먹어야 수프 안에 있는 갖가지 재료들의 제맛을 풍부하게 뿜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똠얌쿵은 주로 수프 그 자체로 먹거나 따뜻한 똠얌에 쌀밥 또는 쌀국수를 넣어 먹기도 한다. ‘난 그래도 도저히 못 먹겠다’고 한다면, 코코넛 밀크 또는 우유를 첨가하면 크림 같은 맛과 질감을 내기 때문에 좀 더 수월하게 먹을 수 있다.
Three go! ‘좌절을’ 맛보고!
광탈(광속 탈락)의 맛 ‘고수(Coriander)’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의 음식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재료는 열대과일과 향신료 그리고 허브다. 그중에서도 가장 즐겨 쓰는 허브가 바로 호불호의 끝판왕 ‘고수’다. 개인적으로 느낀 고수의 맛은 한 마디로 모든 미각을 파괴할 만큼 적응 안 되는 맛이라고 감히 평하고 싶다. 하지만 동남아 여행을 하게 되면 슬프게도 대부분 음식에 이 고수가 음식 가장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동남아 사람들에겐 너무나도 사랑받는 이 고수, 하지만 단순히 식재료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동남아는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모기가 많은 편인데, 화학 성분의 약을 뿌리지 않고 흔히 자연 요법을 이용한다. 모기 퇴치에 특효인 고수를 직접 먹어 손쉽게 모기를 쫓는다. 고수를 섭취하면 모기가 싫어하는 특유의 향이 체취를 통해 풍기기 때문에 잘 물리지 않는다고 한다. 고수 요녀석, 요물일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고수느님. 그래서 필자는 동남아 여행을 가면 딴 건 다 영어로 말하더라도 결코 절대 이 말만은 현지어로 달달 외워서 간다. “고수는 빼주세요”.
***참고 특별 부록 동남아 나라별 “고수는 됐어요” 태국:마이 싸이 팍치 홍콩 마카오: 짜우임싸이 대만: 부야오 샹차이 베트남: 꽁 쪼 라우텀 |
요리조리 젓가락을 휘저으며 미각 파괴자 고수를 피해 맛있는 음식들을 ‘무사히’ 먹었다. 하지만 고비의 구도 똠얌을 먹던 중 우려하던 대참사는 기어코 일어나고야 말았다. 철저하게 검열한 면발들을 집어든 젓가락 사이로 약간의 고수가 끼어있었던 것이다. 방심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한 입에 담아 씹어버렸고, 혀 전체가 찌릿하면서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 순간 문득 또다시 기분 나쁜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사실 필자는 고수를 싫어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5년 전, 대학 졸업 전 마지막 학기였던 나는 여느 또래처럼 취준생으로의 삶에 막 뛰어든 애송이였다. 청춘의 패기와 열정이 철철 넘칠 때여서 그런지 각종 공모전에 참가하며 자연스럽게 영상 콘텐츠 포트폴리오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고 덕분에 언론사 공채에서도 나름 선방을 했다. 그러던 중 취준생 경력 불과 한 달 만에 최종 관문까지 오르게 되는 기적의 순간이 벌써 나에게 찾아왔다.‘역시 인생은 한 방? 한 번에 끝내주지’라는 생각으로 면접 당일까지 매일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면접 준비를 했다. 대망의 날, 왠지 좋은 기운을 얻으면 더 잘될 거라는 마음에 면접의 신이라고 불리던 모 선배를 만나 긴장도 풀 겸 점심을 먹기로 했다. 메뉴 선택도 철저했다. 소화가 잘되고 부담이 적은 음식인 베트남 쌀국수였다. ‘면접의 신’ 선배 역시 기꺼이 평소보다 좀 더 기를 모아야 한다며 나름 베트남 현지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맛집으로 데려갔다. (그게 결국은 큰 화를 불러일으킬 줄은 그때까지 몰랐다) 가장 ‘기본템’이라 불리는 흔한 양지 쌀국수를 시켜놓고 기다리는 동안 면접의 신만 터득한(?) 세세한 팁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나온 쌀국수. ‘역시 현지 쌀국수는 비주얼이 살아 있네’ 싶었다. 평소 베트남 프랜차이즈 음식점에서 먹던 쌀국수와는 달리 국수 한가운데 웬 쑥이 올려져 있었다. 별 의심 없이 쑥(이라고 부르고 고수라 쓴다)과 숙주를 국물에 퐁당퐁당 담가 육수에 우려냈다. 그리고 긴 면발을 집어 들어 입 속으로 호로록. 그 순간 입 안에서 이상한 맛이 터지며 평온했던 정신마저 초토화됐다. 혀를 마비시킬만큼 강렬한 그 맛은 순식간에 식욕을 억제했고, 반사적으로 수저를 놓게 했다. 결국 처음으로 쌀국수를 다 남긴 채 멘붕상태로 유유히 면접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본격적인 참사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면접까지 약 1시간 정도 넉넉하게 남겨두고 면접 장소에 도착했으나 놀란 위장은 좀체 진정하질 않았다. 넉넉하게 면접 질문을 보며 마음을 다스리려 했던 내 예상은 처참히 깨졌다. 30분 전, 15분 전까지 놀란 위장 때문에 끊임없이 화장실로 향했고 결국 면접 질문은 단 하나도 제대로 못 본채 사색이 되어 겨우 면접장에 들어갔다. 머릿속은 당연히 백지장 상태, 온통 화장실 생각뿐. 지금 생각해도 그때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이 안 난다. 그 날의 최종 면접 경험은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약 5일 후, ‘귀하의 역량은 충분하나 제한된 인원으로 인하여…’ 그날의 고수와의 추억은 탈락의 트라우마로 고스란히 남았다. 탈락한 것도 서러운데, 그 날의 장염은 지독하게도 약 2주 동안 내 모든 일상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고수(高手)만이 느낄 수 있는 맛이 과연 고수일까’
/정가람기자 garamj@sedaily.com
그래도 못 찾겠다 불안하다 싶으면 그냥 인터넷에 ‘창수린’이라고 검색해서 찾아가길.
**가격: 1인당 약 1만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