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세계적 생명과학자 신승일 박사 "운 좋게 쌓은 과학 지식으로 조국에 기여하고 싶었다"

한국 바이오산업에 큰 족적

美 의대교수 탄탄대로 마다하고

"바이오산업 키우자" 사명감으로

국내기업과 협업·인재 육성 매진

세계 3번째 B형간염 백신 개발

"서양 향한 열등감 벗어나려면

창의·혁신 이끌 융합교육 필요

청년인재 양성에 도움되고 싶어"

세계적 생명과학자인 신승일 박사가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자택에서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송은석기자세계적 생명과학자인 신승일 박사가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자택에서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송은석기자




세계적인 생명과학자 신승일 박사는 올해 일흔여덟이지만 목소리는 힘이 있었고 미소는 아이처럼 해맑았다. 한국 바이오산업에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별로 한 게 없다”며 겸손하게 손사래를 쳤다.


젊은 시절 신 박사는 세계 유수의 대학과 연구소에서 러브콜을 보내는 유망한 과학자였다. 20~30대 때 몸담았던 미국 브랜다이스대, 네덜란드 라이덴국립대, 영국 국립의학연구소, 스위스 바젤면역학연구소, 미국 알버트아인슈타인의과대는 모두 당대 생물학, 유전학 분야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연구기관이었다. 스위스 유명 제약사 로슈가 세운 바젤면역학연구소의 경우 1970년 설립하면서 전세계에서 우수 과학자 15명을 모았는데 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포함된 인물이 바로 신 박사다.

신 박사의 연구 업적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 암세포의 변화과정을 연구할 때 면역시스템이 일부 없는 돌연변이 쥐인 ‘누드마우스’를 이용하는 연구방법을 처음 도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연구방법은 오늘날 암 치료제 연구에서 일반화됐다.

신 박사는 “1960년대 한국은 매우 가난했는데 운 좋게 세계 과학 강국에서 공부를 할 수 있어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해외 대학, 연구소에서도 ‘가난한 한국인’이 아닌 한 사람의 ‘생명과학자’로 대접해줬다”며 “진리 탐구에는 국경이 없는 과학의 힘이 아니었나 싶다”고 밝혔다.

1972년 34세의 젊은 나이에 미국 알버트아인슈타인 의과대에서 교수 자리에 올라 탄탄대로를 걷던 신 박사의 인생은 1982년 변곡점을 맞는다. 1970년대 말부터 미국에서 제넨텍, 암젠 등 바이오벤처들이 활약하면서 국내서도 바이오산업을 육성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국제상사, 제일제당 등 기업들이 신 박사와 같은 미국 과학자에 협업을 제안하면서 ‘유진텍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가 탄생했다. 신 박사는 이 회사 대표를 맡아 한국 청년들을 미국에서 교육해 차세대 바이오산업 일꾼으로 키워내는 역할을 했다. 유진텍은 제일제당과 함께 의약품 연구개발(R&D) 사업도 했다. 세계에서 3번째로 개발한 B형 간염 백신이 그 결과물이다. 이때 개발한 백신은 3달러라는 싼 가격에 국민들에게 공급됐다. 이 과정에서 신 박사는 미국 대학 교수 자리에서 자연스레 물러났다.

신 박사는 “한국에서 바이오 사업을 한다고 하자 당시 대학 학장이 ‘왜 그러느냐’고 핀잔을 줬다”며 “하지만 아직 나라가 가난한데도 운 좋게 선진국에서 실력을 쌓았으니 과학을 통해서 고국에 기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 때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전했다.

신 박사는 국내에서 개발한 B형 간염 백신을 가난한 나라들에 보급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허가 난 약은 믿을 수 없다며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그는 국제연합(UN) 등을 상대로 “한국 같은 중진국이 저개발국을 돕는 것이 의미 있다”, “가난한 나라에 백신을 원활하게 공급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며 설득에 나섰고, 오랜 노력 끝에 1994년 UN 국제백신연구소를 한국에 유치하는 결실을 맺었다. 이는 국내 최초로 국제기구를 유치한 사례로 기록됐다. 당시 중국도 주룽지 전 총리를 내세워 유치전에 나섰으나 신 박사의 노력을 이길 수 없었다.

신 박사는 “연구소가 생기면서 세계 유수의 과학자들을 국내에 유치하게 돼 우리나라 바이오산업 역량이 올라가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됐을 것”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국내 대표 바이오기업 셀트리온의 탄생에도 신 박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은 의외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1990년대 말 제넨텍 자회사 백스젠은 에이즈 백신 개발을 추진했는데 제품 개발 원가를 낮추기 위해 해외에 연구생산시설을 지을 만한 곳을 찾고 있었다. 당시 백스젠 수석자문위원이었던 신 박사는 한국에 시설을 지을 것을 제넨텍에 추천했다. 마침 바이오 사업에 관심이 있던 현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과 의기투합해 백스젠으로부터 기술 이전, 투자를 받고 에이즈 백신 개발을 위한 한-미 합작회사를 한국에 세우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탄생한 회사가 셀트리온이다.

신 박사는 “결국 에이즈 백신 개발은 실패했지만 그 과정에서 미국의 선진적인 바이오의약품 제조 시스템과 노하우를 한국에 이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셀트리온은 이후 업종을 바이오시밀러(복제약)로 바꿔 현재의 성공에 이르렀으니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이라며 웃음을 지었다.

신 박사는 2008년 셀트리온 고문 자리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혔다. 그러다 지난 9월 귀국해 서울대에 10억원을 기증했다. 10억원은 융합 교육을 위한 ‘암곡 강좌’ 개설, 운용에 쓰기로 했다.


신 박사는 “주위에 노벨과학상을 탄 친구들을 보면 하나같이 문학이나 음악 등에도 조예가 깊다”며 “창의성과 혁신성은 그런 융합 교육에서 나온다”고 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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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직도 서양에 대한 열등감이 많습니다. 열등감을 벗어나려면 실력을 길러야 하고 교육이 그 첫걸음입니다. 융합 교육을 통해 실력 있는 청년들을 길러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신승일 박사는

1938년 출생

1962년 미국 브랜다이스대학교 화학 학사, 생화학 박사

1969년 네덜란드 라이덴국립대학교 유전학연구소

1970년 영국 국립의학연구소

1970년 스위스 바젤면역학연구소

1972년 미국 알버트아인슈타인의과대학교 교수

1984년 유진텍인터내셔널 사장

1992년 UNDP(유엔개발계획) 수석보건자문관

1994년 국제백신연구소 소장

2002년 셀트리온 이사·고문

서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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