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계공학과 물리학을 중심으로 한 과학계는 빛에 반응하는 신소재, 즉 광반응 고분자 소재에 주목하고 있다. 빛에 반응하는 소재로 물체를 만들면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도 빛을 쬐어 물체의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얼마나 움직임을 정확하고 정밀하게 제어하느냐’이다. 기계의 크기는 갈수록 작아지고 나노미터(10억분의 1m·㎚) 단위의 반도체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창조과학부가 주관하고 한국연구재단·서울경제신문이 공동주관하는 이달의 과학기술인상 11월 수상자인 조맹효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는 광반응 고분자 소재의 기계적 동작 설계와 응용을 위한 멀티스케일 해석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멀티스케일은 현상을 해석할 때 특정 영역은 미시적인 수준으로, 나머지 영역은 거시적으로 접근하는 분석 기법이다.
멀티스케일은 강한 빛을 쬐면 광이성질화 현상이 발생해 기계적 변형을 일으키는 광반응 고분자 소재의 특성을 고려한 방식이다. 광이성질화는 물질이 빛을 흡수하면 물리적·화학적 작용으로 분자식은 동일하지만 구조가 다른 화합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조 교수는 어디에 얼마 만큼의 빛을 어떤 세기로 쬐어주면 소재가 어느 정도로 변화하고 움직이는지를 계산할 공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조 교수는 “광반응 고분자 소재를 대상으로 한 연구는 있었지만 ‘멀티스케일 공식’을 만들어낸 건 우리 연구가 처음”이라며 “빛의 조건이나 재료가 바뀌는 변수가 있으면 반응이 어떻게 되는지는 최초로 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식 산출에는 ‘분자동역학 전산 해법’이 적용됐다. 다양한 물리 작용과 선형·비선형 운동을 모두 담아낼 구성방정식의 필요성이 컸다는 것이 조 교수의 설명이다.
이번 연구 성과는 부품 중 일부가 유연한 유연(소프트) 로봇 제조나 인간의 접근이 어려운 재해 지역에서 원격조종이 가능한 무선기기의 재료를 만드는 데 활용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반도체·항공, 심지어 배터리 분야에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 조 교수의 설명이다.
조 교수는 “10㎚ 크기의 반도체를 제작한 뒤 식각(마무리 표면가공)을 하면 표면이 울퉁불퉁한 경우가 있는데 일반적인 방법이라면 뒤처리를 하다가 반도체 자체의 크기를 훼손할 수 있다”며 “멀티스케일 설계의 좋은 적용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올해 6월 미국 항공기 제조사인 보잉사로부터 멀티스케일 해석 기술을 항공기 제조에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항공기 역시 비선형적 움직임이 많은, 복잡한 계산이 필요한 분야이기에 조 교수의 멀티스케일 해석 기술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이다. 조 교수는 “항공기 부품 제작을 위해 설계 단계에서 데이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계산하면 한 달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며 “멀티스케일 공식을 적용해 여러 데이터 중에서 실질적으로 영향력이 큰 데이터를 추출해 이 대푯값을 계산하면 하루 만에 계산을 마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계산 속도는 최대 100배까지도 빨라진다는 것이 조 교수의 주장이다.
배터리에도 분자동역학적 접근이 가능하다. 배터리를 충전, 방전할 때 배터리 내부의 전압 차에 의해 전자가 이동하는 현상을 화학뿐 아니라 역학적 시각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급속 충전 방식이 배터리 기술의 주류로 자리 잡으면서 전자의 이동이 매우 빠른 ‘극한 조건’에서의 정상 작동이 중요해지고 있는데 다양한 변수를 수식화하는 멀티스케일 공식은 이런 점에서 유용하다.
학사와 석·박사 모두 항공공학을 전공한 조 교수는 복합재료, 거시적 역학 거동에 대한 모델링과 해석이 주 연구 분야였다. 그런데 고체의 움직임을 더욱 세밀하게 분석하려면 분자의 움직임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마침 지난 2003년 서울대에 소프트 로봇 선도연구센터(ERC)가 들어섰고 여기에서 분자동역학 연구를 처음으로 접하게 됐다.
“산업 현장에서 벌어지는 공학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저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이를 위해 ‘선 설계-후 응용’인 기존의 연구 방식을 넘어 ‘데이터 주도 멀티스케일 시뮬레이션’을 정립하려고 합니다. 새로운 연구와 교육의 초석을 다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