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이 또한 지나 가리다’ 11/11/11





11월11일. 의미가 많은 날이다. 우리나라 청소년의 십중팔구는 ‘빼빼로 데이’라고 부른다. 1995년11월11일, 수능을 11일 앞두고 막대 모양의 초콜릿 과자를 먹으면 시험을 잘 본다는 속설 때문에 퍼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날은 1964년부터 지켜온 ‘농업인의 날’이기도 하다. 11일의 한자(十一)을 합치면 흙 토(土)가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초콜릿보다는 우리 쌀로 만든 떡을 먹자는 ‘가래떡 데이’가 생겨난 것도 농업인의 날과 무관하지 않다.


중국에서는 이날이 ‘독신자의 날’(光棍節)이다. ‘혼자’를 의미하는 1이 네 번이나 겹치기에 ‘십일절’로도 불리는 이날은 대대적인 온라인 가격 할인행사가 펼쳐진다. 11월11일은 한국해군의 창설기념일이기도 하다. 1977년에는 이리역 폭발사고가 발생해 59명이 목숨을 잃은 비극의 날이기도 하다. 또한 세계적인 추모일(Memorial day)로도 기억된다. 영국과 영연방국가의 현충일이며 미국의 1차대전 전사자 추모일이다. 한국전 참전 용사들이 묻힌 부산 유엔(UN)묘지에도 이맘 때면 세계에서 추도객이 찾아든다.



11월11일이 전사자 추모일로 기억되는 이유는 1차 세계대전이 1918년 이날 종료된 데서 유래한다. 연합국과 독일군 대표들은 이날 새벽 프랑스 북부 콩피에뉴 숲의 열차에서 만나 오전 11시를 기해 모든 적대행위를 종료하기로 합의했다. 종전을 몇 시간 당길 수 있었으나 영국 대표가 11시를 고집했다고 전해진다. 해마다 11월11일11시가 되면 유럽 각지 전사자 묘역에서 추도 사이렌이 울리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전쟁은 끝났어도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미증유의 전쟁, 주로 참호 속에서 보낸 1450일 동안의 상처가 너무도 컸다. 양쪽 군대의 전사자만 991만명. 행방불명으로 처리돼 끝내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도 775만명에 이르렀다. 살아 돌아왔으나 2,122만명은 몸이 상했다. 멀쩡하게 돌아온 병사들은 전체의 절반이 채 못됐다. 민간인들도 전쟁으로 225만, 전염병으로 605만명이 죽었다. 아픔은 오래 갔다. 유럽은 한동안 비관주의에 빠졌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사자나 실종자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상이용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참전병사의 일부는 쇼크에 시달렸다. 일부는 비참한 기억을 잊으려 향락에 젖었다.


미국의 경제사가 존 스틸 고든 ‘부의 제국’을 통해 1차대전의 유일한 승자는 미국 뿐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은 전쟁 초기 ‘돈만 주면 판다(cash & carry)’는 원칙 아래 연합국과 동맹국 양측에 전략물자를 팔아 돈을 챙겼다. 본격 참전한 후에는 ‘거대한 병기창’으로 변모해 전시호황을 누렸다. 연합국이 사용한 석유의 90%도 미국 유전에서 나왔다. 거대한 인적·물적 잠재력이 전쟁을 통해 생산 극대화로 연결되며 미국은 최대 채무국에서 최대 채권국으로 거듭났다. 미국의 농가는 군마가 절실했던 유럽에 농사용 말을 고가에 팔아 기계농으로 변신하는 계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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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케네디의 명저 ‘경제국의 흥망’에 따르면 일본도 전쟁 덕을 톡톡히 누렸다. 열강 중에서 전쟁 기간 내내 제조업 생산이 증가한 나라는 일본 밖에 없다. 연합국 진영에 슬며시 끼어든 일본은 중국과 태평양의 독일 식민지와 이권을 가로챘다. 전시생산에 몰두한 미국과 유럽 대신 섬유시장을 석권하고 해운업을 신장시켜 전후 세계 3대 강국으로 대접받았다.

게르만족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잃었다. 패전 독일은 식민지를 잃고 배상금 부담을 안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도 무너져 무려 650년간 유럽의 중심 가문으로 군림해온 합스부르크 가문의 명맥도 끊겼다. 러시아에는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미국과 일본을 제외한 승전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기진맥진하고 이탈리아는 승전국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불만을 품었다.

씻지 못한 증오와 불만이 컸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이 망각의 동물인 탓일까. 그토록 참상을 겪고도 양대 진영은 20여년 만에 또 다시 맞붙였다. 더 강력해진 무기와 과학기술로 서로를 죽였다.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은 1,2차 대전을 동일한 선상의 같은 전쟁이라고 간주하며 1918년부터 1938년 간의 평화기를 ‘전간기(戰間期)’로 분류한다. 가혹하거나 일방적인 조약은 언제나 후유증을 남기기 마련이다. 합의를 거치지 않는 일방통행은 언제나 위험하다.

존 스틸 고든은 250년간 세계의 중심이었던 유럽이 1차 대전 이후 주도권을 미국에게 내준 이유를 다음 세대를 책임질 젊은이들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독가스와 지리한 참호전 속에서 병사들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끊임없이 죽어 나갔다.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영국과 프랑스, 독일 세 나라의 1892년~1895년생 남자의 3분의 1이 참호 속에서 죽거나 사라졌다. 부모 형제들은 평생을 고통 속에 보냈다. 누가 함부로 전쟁을 얘기하는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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