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1월25일, 프라하.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회가 헌법 542호를 통과시켰다. 골자는 연방 해체와 분리 독립. 분리날짜를 12월31일로 못박았다.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은 유지하되 각각 자치공화국으로 분리하자는 분리안이 불과 1표 차이로 부결됐던 2월과 10월의 연방의회 투표와 달리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지방선거 마다 세를 불린 민족주의 정당들은 연방 존속론자였던 하벨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한 뒤 전광석화처럼 분리를 성사시켰다.
연방 해체를 규정한 마지막 헌법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는 1918년 연방 구성 이래 74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행스러운 점은 누구도 피를 흘리지 않았다는 점.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독재 체제가 1989년 대학생과 지식인들의 무혈혁명(벨벳 혁명)으로 막을 내렸듯이 각각 분리 독립하는 과정에서도 유혈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 때문에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분리는 ‘벨벳 이혼’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벨벳 혁명의 주역이었던 문인 출신 하벨 대통령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방은 왜 갈라졌을까. 체코와 슬로바키아 지역 간 민족 구성과 언어가 상이했어도 연방 존속론이 만만치 않던 상황. 불과 1년 전만 해도 분리에 반대하는 국민 여론이 66%로 3분의 2를 넘었다. 분리 독립의 추동력은 두 가지 방향에서 불어왔다. 감정적 민족주의와 경제력 격차에 따른 슬로바키아 지역의 불만. 민주화의 경제적 과실을 체코가 독점한다는 불만이 민족주의에 기반한 분리 운동에 불을 붙였다.
경제력 격차는 실제로 더 벌어지고 있었다. 민주화 이후 서방 각국의 투자가 체코 지역에 몰렸다. 서방 투자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체코 지역은 서방의 어느 지역과도 견줄 수 있을 만큼 정밀 공업 수준이 높았다. 중세 보헤미안 공국 시절부터 다져온 공업기반 덕분에 체코 지역은 민주화 이후 활발한 외자 유치로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경제 안정을 되찾았다.
반면 군수공업 외에 이렇다 할 제조업이 없는 농업지대였던 슬로바키아 지역은 경제난에 시달렸다. 냉전 체제 아래 옛 공산권에 대한 무기 수출은 옛말. 군수 공장들이 잇따라 가동을 중단하는 바람에 경제난에 시달렸다. 실업률 5~7% 안팎으로 상대적인 고용 안정을 누리던 체코 지역과 달리 슬로바키아 지역은 20%가 넘는 고실업에 시달렸다. 더욱이 민주화 이후 구 공산체제 아래 국가가 지급하던 배급이 끊기고 지역에 대한 연방정부의 보조금까지 줄어들었다.
서방자본의 투자가 체코에 집중되며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상황을 막다른 골목이라고 판단한 슬로바키아 민족주의자들은 ‘불편하고 불평등한 동거 대신 이혼이 낫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슬로바키아의 주도 속에 연방은 해체되고 말았다. 구 동구권에서 소련 연방과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 이후 세 번째 국가 분리.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인구 비율에 따라 모든 것을 2:1의 비율로 나눴다. 연방재산(221억 달러)에서 국채, 해외 공관까지 이 비율을 지켰다. 주요 군 장비로 같은 비율을 적용해 갈랐다. 다만 장병들이 어떤 나라를 조국으로 선택할지는 개인의 자유의사에 맡겼다.
분리 독립 24주년을 맞는 오늘날을 기준으로 보자면 벨벳 이혼의 결과는 ‘해피 엔딩’이다. 분리 초기에는 더욱 벌어지던 경제력 격차는 시간이 흐르며 빠르게 줄어들었다. 슬로바키아의 자동차 산업 등에 한국의 기아자동차 등 해외 자본이 들어오며 두 나라의 정치와 경제는 각각 안정을 찾았다. 오늘날 두 나라는 협력(관세동맹)과 선의의 경쟁을 벌이며 동유럽 경제의 허브로 떠오르고 있다. 남 유럽 경제 위기도 비켜갔다.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도 공동 가입해 서방의 일원으로도 인정 받았다.
체코와 슬로바키아에 특별한 변수가 나타나지 않는 한 민족주의 감정에 과도하게 치우칠 것이라는 지적은 우려로 끝날 것 같다. 무엇이 분리과정에서 피를 봤던 옛 소련과 유고연방의 경우와 대조적인 결과를 낳았을까.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며 칼과 폭력에 의존하기 보다 대화와 합의를 중시한 게 원동력이 아닐까.
체코와 슬로바키아 간 ‘행복한 이혼’은 ‘촛불’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벨벳 이혼을 낳은 1989년 벨벳 혁명의 시발점이 1988년3월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현 수도)의 광장에서의 평화적 촛불 시위였으니까.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평화로운 분리와 발전은 작은 촛불들의 염원이 모인 결과인 셈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촛불은 이후 평화시위의 상징으로 전세계에 퍼졌다.
촛불 말고도 체코·슬로바키아와 이 땅에는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이들 역시 2차 대전 직후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에 의해 점령된 분단 국가였다. 한반도와 독일,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미군과 소련군이 동시에 진주한 4개 분단지역의 하나였으나 일찌감치 미·소 양국군이 철수해 타의에 의한 분단을 피할 수 있었다. 전범국가인 독일과 오스트리아, 다민족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이념과 외세에 의한 분단을 극복했건만 전범국 일본 대신 분단된 한반도는 아직도 전쟁 위협과 편 가르기의 공포에 짓눌려 있다. 촛불에 담을 소망이 참으로 많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