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잠 못 들고 뒤척이고 있다. 오죽하면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했다”고 한다. 불면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주인공은 ‘충무로의 젊은 피’ 박정민(사진). 다음달 9일 개막하는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내 인생에 있을 줄 몰랐다”는 로미오 역을 맡아 엄청난 부담과 고민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그를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연습실에서 만났다.
“철없고 재밌는 허당 소년이죠.” 박정민이 대본에서 느낀 로미오는 달랐다. ‘내 이름 버리고 그대를 갖겠다’고 외치는 로맨티스트요, 사랑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열정남,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떠오르는 미남의 표상과는 또 다른 캐릭터였다. “실연의 아픔을 지닌 채 파티에 갔다가 더 예쁜 여자를 보고 첫눈에 반해요. 허둥대며 유모에게 (줄리엣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요. 이런 16세 소년을 보면서 ‘지금껏 알고 있던 게 (로미오의 이미지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죠.”
배역에 빠져드는 데 꽤 긴 시간이 필요한 배우다. 이번엔 그 속도가 유독 더뎌 압박감까지 느끼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언어들이 건넨 숙제 탓이다. 산문집을 낼 만큼 글쓰기를 즐기는 박정민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언어로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정리하는 데 익숙하다. ‘단어로 된 음악’이라 불리는, 화려한 수사와 리듬감 충만한 셰익스피어의 대사는 그래서 더 낯설다.
그는 “보통 영화는 대사가 현대의 것인데다 내 입에 맞게 조금 바꾸어도 되지만, 이번 작품에선 그럴 수가 없다”며 “캐릭터도 나와는 너무 달라 더 어려운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표현은 이렇게 해도 ‘로미오와 줄리엣’의 영문 원서는 물론 20년도 더 된 셰익스피어극단의 워크숍 영상까지 찾아보며 대사의 맛과 멋을 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상대역인 문근영은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숫기 없어 사람과 친해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박정민이지만, 문근영과는 일찌감치 연습을 시작해 많이 편해졌다. “둘이 상의하고 이런저런 시도도 함께 하며 의지하고 있어요. 얼마 전엔 근영의 제안으로 로미오가 줄리엣 집 발코니 아래서 고백하는 장면을 연습실 밖 난간에서 연습해보기도 했죠.”
박정민은 2014년 극단 ‘경’(鏡)을 만들고 ‘G코드의 탈출’이란 공연을 올리는 등 연극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에서 연기과로 전과한 이유도 연극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4년간 월간지에 칼럼을 쓰고 그 글을 묶어 산문집(쓸만한 인간)을 낼 만큼 필력도 갖춘 그는 “남에게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지만” 틈틈이 희곡도 쓰고 있다.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도 ‘써보고 싶은 캐릭터’를 발견했다. 바로 줄리엣의 약혼자인 패리스. “패리스가 작품에서 크게 주목받지는 못하지만, 잘 뜯어보면 정말 웃긴 배역이에요. 여러모로 완벽해 보이는데 뭐 하나 제대로 안 풀리고, 끝내 얻는 것 없이 로미오 손에 죽죠. 공부는 잘하는데 연애는 못하는 현대의 인물로 풀어내 코미디극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의 대본 한쪽엔 ‘패리스 외전’이란 메모가 적혀 있다.
대본을 볼 때마다 새로운 게 눈에 들어와 ‘아차’하고 원점으로 돌아가길 반복하고 있단다. 배우는 괴로울지언정 “관객에겐 많이 웃을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라는 게 고민 많은 로미오의 장담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이 아닌 희비극이에요. 고전을 본다는 생각 대신 가벼운 마음으로 와서 즐겨주시면 됩니다.”
박정민의 ‘색다른’ 로미오는 오는 12월 9일~2017년 1월 15일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만나볼 수 있다.
사진제공=샘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