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1991년12월9일, 전세계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쏠렸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 최대 관심사였던 소련의 존속 여부에 대해 그가 입을 열었다. ‘국제적·지정학적 주체로서 소비에트 연방은 오늘로 사망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로루시(백러시아) 등 슬라브계 3개 공화국의 공동성명으로 소비에트 연방은 독립된 주권을 갖는 12개 국가로 조각났다. 소련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소비에트공화국’이 세워진 지 74년 만이다.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연방의 존속을 위해 애썼으나 역부족. 불과 100여 일 전에 ‘강력한 소련으로 돌아가자’며 보수파들이 일으킨 군부 쿠데타도 시민들의 외면과 옐친 대통령의 결단으로 무위로 돌아간 뒤부터 소련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군부에 감금 당했다가 풀려난 고르바초프가 ‘연방 해체는 공멸을 초래할 것’이라며 ‘소비에트 연방’의 이름만 바꾼 ‘주권국가 연합’ 창설을 제의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소련 전체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슬라브계 3개 공화국은 생각이 달랐다. 민족별로 분규가 일어나는 마당에 더 이상 소비에트 연방의 깃발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크라프추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슈슈케비치 벨라루시 최고회의 의장은 벨라루스의 한 별장에서 이틀간 비공개회담 끝에 소비에트 연방의 숨을 끊었다. 슬라브계 공화국 지도자들은 공동성명에서 ‘중앙(공산당)의 단견적 정책이 정치·경제 위기를 초래하고 국민들의 생활에 파탄을 야기해 민족 간 분규가 심해져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며 개별 공화국들의 주권이 유지되는 ‘독립국가연합’의 성립을 선언했다.
한때 세계를 집어 삼킬 것 같았던 소련을 무너트린 것은 무엇일까. 원인과 결과는 항상 같은 곳에 있기 마련. 소련의 생성과 소멸은 모두 경제로부터 야기됐다. 전근대적 전제 왕정 아래 중노동과 체임에 시달리던 노동자와 급여를 제 때 받지 못한 병사들의 노병(勞兵) 소비에트가 소련의 시발점이었다. 혁명은 농업국가 러시아를 현대 산업국가로 변모시켰다. 1917년~1940년까지 소련의 공업 총생산 연평균 증가율은 10.8%에 달한다. 2차 세계대전후 소련이 미국과 자웅을 겨루는 초강대국 지위를 누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계획 경제 아래 불균형 성장은 날이 갈수록 분명한 한계를 드러냈다. 무엇보다 과도한 군사비 지출이 소련의 발목을 잡았다. 미국과 대결하기 위한 군사력 건설에 국내총생산(GDP)의 20%를 지출하고, 항공 우주와 중화학 공업에 치중한 결과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취약한 경공업 생산력 아래 중앙 관료가 수요와 생산을 통제하는 계획경제로 인민들은 간단한 생필품을 사려고 장사진을 쳤다. ‘사회주의 형제국’에 대한 과도한 경제·군사 원조 등 ‘혁명 수출 비용’ 역시 소련을 속에서부터 멍들게 만들었다.
소련 경제는 1970년대 중반부터 난기류에 빠졌다. 성장률이 3%대로 주저앉았다.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를 비롯한 농업 잠재력에도 농산물 생산은 아예 정체·감소돼 식량 수입국으로 전락했다. 소련 지도층은 총체적 위기를 위기로 여기지 않았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 위기로 국제유가가 올라 급증한 외화수입 탓이다. 세계 최대 석유수출국이 누리는 오일 달러의 반짝 경기에 취해 속병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정책 엘리트들은 위기를 감추고 오히려 악용했다. 서방에서 밀수입한 상품으로 지하경제가 형성돼 빈부격차가 벌어졌다.
공산당 내 엘리트 그룹은 ‘노멘클라투라’라는 특권층으로 자리 잡았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회주의에서 빈부격차와 특권 계층이 형성되는 아이러니 속에 경제는 더욱 망가져 1980년부터는 성장률이 사실상 제로(0) 상태로 떨어졌다. 세계적인 저유가 현상으로 소련 경제의 취약점이 드러난 시기에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의 구렁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군사비도 그만큼 더 들어가고 ‘사회주의 제국주의자’라는 국가 이미지는 더욱 나빠졌다.
‘늙고 지친 붉은 곰’ 소련의 체제 위기 속에 1985년 54세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에 올라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로 회생을 찾는 것 같았지만 속병은 이미 깊어진 상황. 소수민족의 독립 요구와 동구권의 자유화 바람, 베를린 장벽 붕괴에 이어 소련도 종말을 고했다.
소련을 승계해 자본주의 국가로 변신한 러시아 역시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극심한 인플레와 불황으로 루블화 평가 절하와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 선언)까지 겪었다. 블라드미르 푸틴의 등장 이래 ‘강력한 러시아’로 살아나는 것 같았어도 유가 하락의 직격탄을 맞고 비틀거리고 있다.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옛 시절이 좋았다’는 불만이 어김없이 구 소련 지역 국가들에서 고개를 든다. 과연 소비에트 러시아는 다시 역사에 등장할 수 있을까.
일본계 미국인 정치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소련 해체 직후인 1992년 ‘역사의 종언’을 통해 ‘대안은 패배했고, 거대 대안들의 투쟁 서사로서 역사는 끝났다. 미래는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이익을 따르는 세계 시장과 다국적 기업’이라고 단언했다. 후쿠야마의 진단이 현상일지언정 지속 가능한지는 의문이다. 소련 멸망 이후에 세계 경제 위기는 오히려 더 빈번해지고 지역 간, 민족 간, 종교 간 분쟁도 심해지고 있으니까.
소련 해체 사반세기.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악의 축’이라던 소련이 없어지면 평화가 정착될 것이라고 여겼지만 과연 그럴까. 긴장 속에 상존(相存) 대신 들어선 미국의 독주 체제는 과연 선(善)인가. 인간은 태생적으로 싸움을 좋아하는지 지구촌의 긴장과 갈등은 여전하다. 자본주의로 변신한 러시아에서도 구 소련이 안고 있던 불평등과 부패의 문제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소련 해체는 동서고금의 일반론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소수 특권계층이 판치는 사회의 미래는 없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