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임금님이 한 분 계셨다. “대감, 이번에 아주 중요한 포스트가 하나 비었소. 사람 한 명을 천거하시오.”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감은 이렇게 아뢴다. “폐하! 그 자리에는 그 사람이 적임자이옵니다.” 임금은 화들짝 놀라면서 말한다. “아니 대감, 그 사람은 그대의 원수가 아닌가? 어떻게 원수를 추천한단 말이오! 이해할 수가 없구려….” “폐하, 그래도 그 자리에는 그 사람이 적임자이옵니다.” 임금은 추천을 받아들여서 그 사람을 기용한다. 그 사람은 일을 엄청 잘한다. 임금은 그 인사에 대단히 만족한다.
“대감 이번에도 자리가 하나 났소! 이번에는 누구를 추천하겠소?” 잠시 머뭇거리며 생각에 잠긴 대감은 이렇게 아뢴다. “폐하, 그 자리에는 제 둘째 아들이 적임자이옵니다.” 자, 여러분이 임금이라면 이 두 번째 추천을 받아들일까요. 안 받아들일까요. 당연히 그 임금은 두 번째 추천도 받아들인다. 그 나라는 그때부터 망해가기 시작한다. 그 아들은 다음 자리에 자신의 친구를 데려오고, 그 친구는 자신의 친구를, 그 친구의 친구를 계속 데려왔기 때문이다. 리더가 한 사람의 말만 계속 찰떡같이 믿는 것은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이다.
“길을 비켜라! 무엄하도다. 내가 누군 줄 아느냐? 바로 이 나라의 둘째 왕자다!” “왕자님, 국법에 따라 임금님을 뵈올 때는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합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왕자와 보초는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한다. 왕자가 보초의 지시에 불응하면서 계속 말 위에 올라타 있자, 보초는 한술 더 뜬다. “왕자님, 국법에 따라 임금님을 알현할 때는 누구든지 칼을 소지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양자 간의 말싸움이 소란스럽게 되자, 결국 두 사람은 임금 앞에 불려 간다.
자초지종을 들은 임금님은 왕자의 칼을 빼 그 자리에서 보초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만다. 그 나라는 그때부터 망해가기 시작한다. 이 처참한 광경을 지켜본 보초들은 그다음부터 그 왕자가 오기만 하면 무조건 프리패스다. 그 왕자가 친구를 데리고 올 때도 덩달아 프리패스다. 결국에는 왕자 없이 그 친구가 다른 친구를 데리고 올 때도 프리패스다. 왕자의 이름만 대면 다 프리패스가 되고 만다. 임금 스스로가 국법을 어기는 우를 범한 것의 당연한 귀결이다.
이웃 나라 사신이 와서 임금님께 선물 하나를 한다. 귀한 선물이라고 해서 열어봤더니 거기에는 귀하디귀한 상아로 만든 젓가락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왕은 입이 귀에 걸리도록 좋아한다. 이 광경을 지켜본 한 신하는 그날로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왜냐고? “임금이 상아 젓가락을 보면서 좋아하는 것을 보니 이제 그 젓가락으로 시금치를 먹을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곰 발바닥, 제비집, 원숭이 골 등등 비싸고 좋은 음식만 먹을 터이니, 백성은 굶주릴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나라는 곧 망해가기 시작할 것이다”라고 그 신하는 생각한 것이다. 임금은 사치를 부리면 그 끝이 없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2500년 전 중국의 철학자 한비자에 보면 다 나온다. 놀랍다. 권력의 사유화, 리더의 무능력이 가져다주는 폐해가 이미 그 옛날에 다 기록돼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군자는 하루에 세 가지를 매일 반성해야 한다. 첫째, 나는 남을 대하는 데 충심을 다하고 있는가. 바로 충(忠)이다. 둘째, 나는 친구를 믿음으로 대하고 있는가. 바로 신(信)이다. 셋째, 나는 스승에게 배운 것을 익히고 있는가. 바로 습(習)이다. 공자님께서 논어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정조의 일성록(日省錄)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리더는 항상 반성해야 한다. 왜?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면 방심하기 때문이다. 리더는 자신의 조직을 이끌어가는 데 권력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반드시 명심하라. 그 권력은 자신의 사적 소유물이 아니라, 조직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기에 그 목적에 부합하도록 소중하게 행사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매일 세 번 반성하라. 아니면 준엄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연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