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백상논단]노동혐오를 혐오하는 이유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노동법 전공

임금체불 등 만연한 노동 경시

사업가·자본 향한 적대감 키워

노동계, 투쟁 일변도 전략 접고

使는 근로자를 파트너로 존중을



“잘가요. 미스 박 세뇨리땅”. 탄핵정국의 혼란 속에서 난데없이 ‘여혐’ 논란이 일었다. 촛불 집회 때 노래 가사가 문제였다. 사실 여성에 대한 편견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은밀하면서도 뿌리 깊다. 언론에서조차 ‘대통령이 여자라서‘ 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분명히 하자. ’박근혜‘ 대통령의 실패이지, ‘여성’ 대통령의 실패가 아니다. 대한민국을 웃음거리로 만든 건 ‘강남 아줌마’가 아니다. ‘최순실’이다. 여혐만이 아니다. ‘노동’에 대한 혐오도 만만치 않다. ‘노동’이라는 글자만 들어가면 일단 빨간 색안경을 쓰고 본다. ‘노동조합’도 그렇고 ‘노동법’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일까. ‘노동법’을 공부한 필자에게, 하필이면 왜 노동법을 공부했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다.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

노동혐오는 청년취업시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실업계 고등학생들은 취업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다. 예비근로자다. 노동법 교육이 꼭 필요하다. 현실은 영 딴판이다. 당장 교장선생님부터 반대한다. 혹여 노동법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면 곧장 그 학교는 기업체로 부터 기피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학생들 실습할 곳조차 찾기 어렵게 된다. ‘노동법 모르는 사람’을 우대한다는 채용 광고가 그저 웃자고 한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노동혐오는 죄의식을 무디게 한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당당하게 만든다. 걸리면 그저 운이 나빴다고 여길 뿐이다. “정부가 최저임금이니 근로시간이니 떠들지만, 그런 거 다 지켜가며 사업한다는 게 사실 말도 안 되는 거예요. 현실을 몰라서 하는 얘기예요.” 중소기업 CEO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나온 얘기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옳소’, ‘옳소’하며 박수를 쳤다. 순간 머쓱했다. 법적 권리조차 ‘사치’와 ‘규제’로 치부되는 중소기업의 현실이 심히 안타까웠다. 우리 노동현실의 민낯을 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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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문제는 노동혐오가 ‘자본에 대한 혐오’를 낳는다는 데 있다. 매년 30만명에 가까운 근로자들이 임금체불을 경험한다. 금액으로는 자그마치 1조원이 넘는다. 일본의 10배 수준이다. 법적 구제 절차도 간단치 않다. 한참동안을 시달리고 애태워야 한다. 차라리 포기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다. 이런 경험을 해본 근로자라면 자본에 대한 혐오로 치를 떨게 마련이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노사관계가 여전히 ‘쟁취와 착취’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이유도 실은 여기에 있다.

사측만 탓할 수는 없다. 노동혐오는 노동계 스스로 자초한 면도 있다. ‘불법적’이고 ‘투쟁일변도’의 노동운동전략 때문이다. 바꾸어야 한다. 촛불집회를 보라. 경찰은 시민들에게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시민들은 수고한다며 경찰에게 커피를 건넸다. 바람이 불면 꺼지고 만다는 촛불이지만, 불의를 향해 이보다 더 준엄하고 무거운 질타는 지금껏 없었다. 그렇다. 이제는 평범한 시민들과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실용적’인 노동운동이어야 한다. 왜 독일 노동조합이 근로자들을 위한 법률지원활동에 잔뜩 공을 들이고 있는 지를 재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최순실은 나라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바로 그 나라를 국민들은 오히려 더 빛나게 만들었다. LED 촛불 덕분이다. ‘정치 혐오’로 얼룩졌던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학습장’으로 변했다. 외신들도 많이 놀라는 눈치다. 이참에 ‘노동혐오’도 털어내자. 근로자를 ‘머슴’으로 여기는 순간 근로자는 사용자를 ‘적’으로 삼는다. 근로자를 ‘파트너’로 존중하는 순간 근로자는 사용자를 ‘가족’처럼 여긴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협력적 노사관계’.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는 이 단어를 이제는 현실로 끄집어 낼 때가 됐다.

임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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