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국민소득을 2배로!’…사상 최고의 호경기



20세기 경제성장의 기적을 이룬 나라는 어디일까. 대한민국? 아니다. 답은 소련. 소련 경제는 1920대 중반부터 세계 경제가 대공황의 몸살을 앓던 1930년대 후반까지 연 20%를 넘는 초고속 성장 가도를 달렸다. 1960년대를 기준으로 삼아도 성장의 기적을 이룬 나라는 한국이 아니라 따로 있다. 일본. 1960년대 일본 경제는 연평균 10.3%씩 커졌다. 한국의 1962~1971년 연평균 성장률 9.3%를 웃돈다.


일본의 전후 부흥을 도왔던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1950년대의 평균 성장률도 9.3%. 당시 일본처럼 선진국 초입의 국가가 10년간 두 자리수 성장을 기록했다는 사실 자체가 세계경제사를 통틀어 유례가 없는 일이다. 놀라운 경제 부흥을 이룬 주역은 총리대신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메이지 유신 이래 모두 62명인 일본의 역대 총리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케다는 어떤 사람인가. 통산성 관료 출신의 작가로 활동하다 경제기획청 장관도 역임(1998~2000)했던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는 저서 ‘일본을 이끌어 온 12인물’에 이케다를 집어 넣었다. 쇼토쿠(聖德) 태자부터 점령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까지 일본사 에 영향을 미친 12명 가운데 총리 대신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이케다가 유일하다. 이케다가 기억되는 이유는 경제 성적 덕분이다.

이케다 경제정책의 핵심은 국민소득배증계획. 1960년 12월27일, 각료회의에서 의결된 이 계획의 청사진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0년 안에 국민소득을 두 배로 늘리겠다는 계획 자체를 정치적 구호 정도로 여겼다. 미국과의 안보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안보투쟁에 휘말려 물러난 기시(岸) 내각에 이어 등장한 이케다 내각이 국민의 관심을 안보 이슈에서 경제로 돌리려는 이벤트성 구호로 생각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목표는 계획보다 3년 빠르게 현실로 나타났다. 불과 7년 만에 일본의 국민총생산(GNP)은 13억엔에서 26억엔으로 불어났다. 당초 목표인 1970년까지 10년 동안 일본 경제는 약 2.6배나 커졌다. 내용도 알찼다. 소득증가는 물론 농촌 구조 개편 등 다방면의 효과를 한꺼번에 거뒀다. 도쿄올림픽 개최(1964년)와 맞물려 신칸센(新幹線)을 비롯한 각종 사회간접자본도 크게 확충됐다.

국민 생활도 펴졌다. 흑백 TV와 전기 세탁기, 냉장고 보급을 넘어 집집마다 컬러 TV와 에어컨, 자동차를 보유하기 시작했다. 1960년 44만대였던 일본의 승용차는 1970년 678만대로 15배 넘게 늘어났다. 국민들의 기본 인식부터 바뀌었다. 패전의 기억은 아예 사라지고 극심했던 좌·우익 간 이념 대립과 정치에 대한 몰입 대신 경제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일본인들은 ‘GNP’와 ‘성장’을 외쳤다. 다케다 하루히토(武田晴人) 도쿄대 교수(경제학)의 저서 ‘고도성장’에 따르면 ‘경제 발전’이라는 용어를 밀어내고 ‘성장’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인 것도 이 때부터다.

이케다 내각은 소득 배증을 위해 네 가지 과제를 중점적으로 밀고 나갔다. 산업구조의 개선과 자본시장 및 무역 개방, 주택 공급 및 사회복지 확대, 중소기업 육성이 그 것이다. 역점 사업인 중화학공업이 세계시장에서 통하려면 정교한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이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강력한 중소기업 육성책을 펼쳤다. 급격한 성장책을 쓰면서도 복지와 분배까지 챙겼다. 실업보험과 건강보험, 후생보험 등이 이때 생겼다.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드골 대통령으로부터 ‘트랜지스터 세일즈 맨’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만큼 수출과 경제 활성화에 매진했던 이케다는 개인적으로는 병마에 시달렸다. 총리 자리에서도 암에 무릎을 꿇었다. 1964년 후두암 이 발병했을 때 ‘일본이 여기까지 잘 왔는데 앞으로의 부작용이 문제’라며 자신보다 나라를 걱정했다고 전해진다. 병원에 머물다 도쿄올림픽에 참석하고 올림픽 폐막과 함께 물러난 그는 암이 퍼져 이듬해인 1965년8월 사망했다. 이케다가 사망한 이후에도 일본 열차는 계속 달려 목표 년도인 1970년에는 세계 무역의 강자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일본인들은 이 시기를 ‘진무(神武·전설 속의 일본 첫 국왕) 이래 최대 호경기’라고 부른다.


이케다의 소득배증계획은 바다를 건넜다. 한국의 개발독재와 중국 개방·개발 모델의 원형이 이케다식 ‘따라잡기(catch-up)’ 전략이다. 주목할 대목은 일본에서 성장주도론은 한참 전에 용도 폐기됐다는 점. 소득배증계획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계획을 주도적으로 수립했던 경제학자이자 일본 개발은행 이사 시모무라 오사무(下村治)는 일본의 국민소득이 1만 달러가 넘은 1980년대 초부터 제로(0) 성장마저 감수하자는 균형발전론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저서 ‘일본 경제의 절도’(1981)에서 불균형하게 성장하느니 아예 제로 성장하는 게 낫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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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딴판이다. 고도성장의 일그러진 신화에 대한 향수가 강하고 성장우선론의 뿌리도 깊다. 일본처럼 빠르게 선진국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분석이 쏟아져도 인식은 요지부동이다. 일본은 국민소득이 1만 달러에서 4만 달러를 넘는 데 14년 걸렸다. 1995년 1만 달러 선을 돌파한 한국은 15년 지나서야 간신히 2만 달러 대에 안착했다. 대외 요건만 보자면 이케다 내각에는 운이 따랐다. 무엇보다 세계 경제의 흐름이 좋았다. 1960년대 초반 경제개발에 눈 돌린 나라치고 성과를 거두지 못한 나라가 없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경제 환경이 각각 외환위기(IMF사태)와 프라자합의에 따른 환율 변동의 영향을 심하게 받았지만 우리 경제가 얼마나 추동력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다. 소득에 주목할 때다. 이케다의 소극배증론도 급여 배증론부터 비롯된 것이다. 무임소장관 시절 ‘임금 두 배 인상론’을 꺼냈다가 재계로부터 집중 포화를 맞았던 이케다는 총리 대신에 오른 뒤에는 신념을 소득배증론으로 키워 일본의 성장을 이끌었다.

우리나라에서 ‘임금을 올리자’는 장관이, 정치인이 나올 수 있을까. 당장 절대 소득을 올려주기 어렵다면 소득수준이라도 높아야 할 터인데 사교육비와 부동산이 가로 막고 있는 형국이 답답하다. 최경환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은 취임 직후 ‘이제는 고성장에 미련을 버려야 할 때’라며 ‘소득 중심의 성장을 추진한다’고 강조했지만 실행한 정책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빚을 내 집을 사라는 부동산 부양책으로 집값과 전세 가격만 올려 놓았다. 박근혜 정부4년, 소득은커녕 소득수준 향상마저 더욱 기대할 수 없게 됐다.

한국이 물려받은 이케다식 경제발전 전략의 부작용은 이 뿐 아니다. ‘성문화되지 않는 일본 특유의 명령’이라는 ‘행정지도’도 이 시기에 본격화했다. 명저 ‘일본의 기적(MITI and the Japanese Miracle)’을 지은 찰머스 존슨 캘리포니아대 교수(2010년 사망)에 따르면 일본 공무원 사회에서 음성적으로 행해지던 ‘행정지도’는 1962년부터 공식적으로 문서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 임명직 공무원들의 ‘행정지도’는 많이 사라졌지만 선출직 공무원들의 민간에 군림하려는 ‘갑질 본능’은 여전하다. 재벌의 팔을 비틀어 각종 재단을 만드는 행태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졌으니.

일본과 한국이 다른 게 하나 더 있다. 지도자와 측근의 질과 삶에 대한 태도. 사카이야 다이치의 ‘일본을 이끌어 온 12 인물’에 따르면 이케다는 관료 시절부터 매스컴이 자신의 발언을 재미삼아 다르게 옮겨도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소통을 그만큼 중하게 여겼다. 총리대신으로서 그는 ‘관용과 인내’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저자세 총리’라는 말까지 들었다. 스스로 정책을 입안하고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을 갖췄음은 물론이다.

측근들도 마찬가지다. 이케다의 소득배증계획은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두 사람이 두드러진다. 시모무라 오사무와 다무라 도시오(田村敏雄). 둘 다 관료 출신이었으나 성향은 딴판이었다. 시모무라는 케인즈학파에 심취한 관료 출신 학자인 반면 다무라는 관료 출신이지만 사회주의 사상에 젖어있던 참모였다. 상반된 성향의 두 사람을 한데 묶을 수 있었던 이케다의 리더십도 출중하거니와 소득배증계획을 만들고 실행한 일등공신인 두 참모의 처신이 두고 두고 귀감을 샀다.

다무라는 이케다의 선거자금을 관리했음에도 사적으로는 한 푼도 손대지 않았다. 정치 전면에 나서라는 권유는 화를 내며 물리쳤다. 수입은 박봉의 시간 강사 월급이 전부였고 유산은 책 밖에 없었다. 시모무라 역시 이케다 주변을 맴돌지 않았다. 핵심 참모이면서도 이케다와 개인적인 만남을 피해 두 사람이 같은 찍은 사진조차 한 장이 없었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소득배증계획의 주역들은 이랬다.

우리는 어떠한가. 56년 전 일본보다 나은게 도대체 무엇인지…. 혼자 식사하면서 드라마를 즐기고 불통하는 대통령과 호가호위하던 측근들과 국민들에게 지탄받는 공직자들. 유력 대선후보에게 눈도장 찍으려는 교수들까지 곳곳이 썩었다. 선진국은 달러화로 표시되는 게 아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사리사욕을 불명예로 생각하는 엘리트가 있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선진국에서는 엘리트가 고달프고, 후진국에서는 국민이 고달프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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