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삼성물산(000830)-제일모직(028260) 합병을 찬성해 수천억원의 손실을 입었다는 의혹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가운데 기금운용본부장(CIO)에게 권한이 집중된 내부 투자위원회의 의결 구조가 이번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기금운용규정에 따르면 기금본부장은 12명인 투자위의 수장을 맡으며 3명 이내의 실무급 팀장을 위원으로 지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의결 구조는 삼성물산 합병 건처럼 찬반이 첨예하게 갈리는 사안의 경우 본부장이 인사를 통해 사실상 캐스팅 보트를 쥘 수 있어 외부 입김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2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 투자위원회는 지난해 7월10일 위원 12명 가운데 8명의 찬성으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안을 통과시켰는데 위원회가 열리기 며칠 전 위원 3명 중 2명이 교체됐다. 위원장인 홍 전 본부장이 실무급 팀장 3명을 지명했는데 이 중 2명은 불과 1개월 전 SK와 SK C&C 합병 건을 논의했던 투자위 때와는 다른 사람으로 교체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홍 전 본부장이 삼성물산 합병 건을 통과시키려고 무리하게 해당 팀장들을 바꾼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온다. 실제 새로 교체된 두 명의 팀장은 찬성표를 던졌고 삼성물산 합병안은 투자위에서 의결 정족수(7명)을 가까스로 넘긴 8명 찬성으로 통과됐다. 이에 대해 국민연금 관계자는 “SK 합병 건 때는 다른 안건들도 병합해서 심사했기 때문에 해당 관련 실무팀장이 참석했고 삼성물산 합병 건은 단독 안건이었기 때문에 주식 의결권과 관련된 팀장들로 교체된 것”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하지만 기금 운용과 관련해 중요한 투자 결정을 내리는 투자위원회의 표결권 행사 구조가 ‘1인 1표’가 아니라는 점은 되짚어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현 규정상으로는 본부장이 본인의 입맛에 맞는 위원을 최대 3명까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금운용규정 및 기금운용시행규칙에 따르면 투자위원회의 위원장은 본부장이 되고 위원은 각 실장·센터장과 본부장이 지명하는 3명 이내의 팀장으로 구성된다. 경우에 따라선 본부장이 자신을 포함해 ‘1인 4표’를 행사할 수 있는 구조다. 이는 앞으로 제2의 삼성물산-제일모직 안건이 투자위에 상정됐을 경우 정부나 청와대 등 외부 세력이 본부장을 통해 얼마든지 의사 결정에 개입할 수 있는 유혹을 갖게 하는 지점이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본부장이 투자위 안건의 성격에 따라 해당 분야의 실무 팀장들을 지명하기 때문에 본인의 뜻에 맞게 위원을 구성한다는 얘기는 맞지 않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기금본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투자위원회는 543조원의 국민 노후자금의 투자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위원회”라며 “적어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건과 같은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투자위의 의사결정이 외부의 입김에 흔들리지 않게 촘촘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