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칼럼]제약업계의 골목대장들

최형욱 바이오헬스부장

다국적 제약사들 M&A로 고속성장

국내 업체는 후발 추격 시급한데도

경영권 상실 우려해 3세 경영에 집착

'글로벌 제약사 도약' 목표 쉽지 않아

최형욱 부장


지난 1997년 외환위기는 ‘단군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로 불린다. 워낙 충격이 크다 보니 원인 분석도 여러 가지다. 대기업들의 문어발식 확장, 김영삼 정권의 급속한 금융 개방이나 무리한 환율 방어, 노동개혁을 지연시킨 야당, 당시 정책 당국자들의 실책, 노동·자본 등 과도한 요소 투입에 의존한 한국형 성장 전략의 한계 등의 진단부터 한국을 길들이려는 서구자본의 음모론이나 “재수가 없어서”라는 운명론까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고 실제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도 이들 원인이 중첩되면서 발생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재벌 2·3세 오너들의 자리 배치가 외환위기의 주요 원인”이라는 당시 한 경제단체 인사의 가십성 해석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재계는 대기업 오너들이 공식 만남을 가질 때 매출 순위에 따라 자리를 배치하는 것이 관례였다. 집안이나 회사에서 ‘갑(甲)’으로만 지내다가 주변부로 밀려난 재벌 2·3세들은 화가 났다. ‘내가 나이도 더 많고 더 똑똑하고 더 유명한 미국 대학을 나왔는데 회사 규모가 조금 작다고 구석 자리에 찌그러져 있다니.’ 자존심이 상한 일부 재벌 2·3세 오너들은 몸집 불리기에 매달렸다. 때마침 김영삼 정부의 어젠다도 세계화였다. 하지만 경영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재벌 2·3세들이 전근대적인 기업 문화는 그대로 둔 채 공격적인 글로벌화에 매달린 대가는 혹독했다. 외환위기 이전 30대 대기업집단 가운데 중하위권 그룹을 중심으로 절반 이상이 공중 분해됐다.”

IMF 위기의 본질을 지나치게 희화화한 측면이 있지만 흥미로운 해석이라는 생각도 든다. 20년 전 얘기를 꺼내는 것은 제약업계에 불고 있는 3세 경영 바람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동아쏘시오그룹·녹십자·대웅제약·JW중외제약·보령제약·국제약품·현대약품·유유제약·일동제약·동화약품 등 대다수 제약사들이 3세 경영체제가 안착 중이거나 경영권 물려주기 작업이 한창이다.


눈에 띄는 것은 이들 3세 경영인들이 상당수 해외 유학파라는 점이다. 글로벌 마인드로 무장한 이들이 ‘복제약’ 중심의 내수 시장을 벗어나 신약개발과 해외 수출 등을 통해 한국의 제약산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크다. 제약·식품·경영 등 관련 학과를 전공한데다 영업·생산 등 현장 밑바닥부터 경영 수업을 쌓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도 많다. 이들 3세 경영인들도 ‘변화와 혁신’ ‘글로벌 경쟁력 강화’ ‘신성장 동력 강화’를 올해의 화두로 내세우며 질적 도약을 다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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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약업계 3세 경영인들의 진정한 시험대는 지금부터다. 최근 신약기술이나 수출 등에서 일부 3세 오너들의 성과가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선대들이 뿌려놓은 씨앗에 힘입은 바가 크다. 또 앞으로 제약·바이오 산업이 차지하는 경제 비중이 커질수록 3세 오너들에 대한 사회적 검증 공세도 이전과 달리 혹독해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지금 같은 지배구조로는 글로벌 제약사로의 도약 자체가 쉽지 않다는 사실도 명확하다. 글로벌 제약 공룡들은 인수합병(M&A)을 통해 고속 성장해온 공통점을 갖고 있다. 신약개발 하나에 최소 수천억원이 드는 마당에 규모의 경제를 갖추기 위해서는 활발한 이합집산은 여전히 필수 조건이다. 반면 국내 제약사들은 후발추격이 시급한데도 경영권 상실이 두려워 M&A에 오히려 더 소극적이다.

국내 주요 제약사의 연구개발(R&D) 비용을 다 합쳐봐야 세계 1위 제약사 노바티스의 10% 남짓에 불과하다. 자체 성장만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격차다. 국내 제약사들이 3세 경영에 집착하고 ‘골목대장’에 안주할수록 글로벌 제약사라는 꿈은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IMF 때와 마찬가지로 현행 지배구조와 글로벌화라는 목표 간의 충돌 발생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choihuk@sedaily.com

최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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